8월 사람책-허림(시인)_ 홍천 사투리, 시가 되다

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8월 사람책-허림(시인)_ 홍천 사투리, 시가 되다

평화/책

by 함께평화 2020. 7. 29. 08:05

본문

728x90
SMALL

 

허림 시인-

 

<8월 사람책>

홍천 사투리 시(詩)가 되다

허 림(시인)

 

 

 

저는 홍천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4번이나 옮겨 다녔고요. 유급을 했습니다. 중학교는 내면에서 다녔습니다. 고등학교는 홍천고등학교를, 대학은 강릉에서 보냈습니다.

 

시를 쓴 계기는 글을 잘 써서 시작한 건 아닙니다. 제가 1980년대 대학을 다녔는데 신생 학교였습니다. 강릉대학교 영문 영어학과 1회 졸업생입니다. 교수진도 마땅치 않고, 선택할 수 있는 과목도 많지 않았습니다. 학교는 좁고 그러나 도서관이 맘에 들었습니다. 책이 많았습니다.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시를 썼는데 좋은 평을 들었고 상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좋은 글 한 줄이라도 쓰고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우연찮게 시로 이야기하는 동아리에 들어가서 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친구들이 쓴 시를 읽고 또 듣기만 하다가 서로 재밌는 시 쓰기 등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합평도 하며 나름대로 열심히 시를 썼어요.

 

88년도에 강원일보 신춘문예 기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글 쓰는 것을 시작을 했지요.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신춘문예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닙니다. 1,500대 1 정도의 경쟁률을 뚫어야 합니다. 가장 많이 몰리는 부문이 시입니다. 4,500편 정도의 작품 속에서 당선자를 뽑습니다. 그때 당선되고 나서 느낀 점은 ‘아! 나도 먹고 살만 하겠다.’였지요. 원고 청탁이 들어오겠지 생각했는데 4년 동안 원고 청탁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상금은 40만 원이었습니다. 그때가 대학 등록금이 30만 원 일 때였습니다. 지금으로 계산하면 한 400만 원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당선되고 나서 이듬해에는 상금이 60만 원으로 올랐습니다. 그다음에는 100만 원으로 올랐습니다.

 

글이라는 것은 생각이 났을 때 쓰는 것이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제 핸드폰 속에 약 40편 정도의 시가 저장되어 있습니다. 시 한 편 정도는 어디서든 분위기에 맞게 낭송할 수 있습니다.

 

시상이 떠오르거나 생각나면 생각나는 대로 핸드폰에 메모를 합니다. 작가의 기본 태도는 뒷주머니에 수첩과 품에는 볼펜을 늘 끼고 다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전에는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시를 썼습니다. 그러나 핸드폰이 나오고 나서는 녹음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예 바로 써서 메일로 보냅니다. 그러한 작업들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홍천도서관에서 제가 아이들 글짓기 교실을 12년 동안 했습니다. 1998년도 문화학교가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 글짓기 교실, 창작교실을 개설하여 운영하였습니다. 3년 후에는 (홍천 도서관이 정 도서관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문학뿐만이 아닌 다른 분야도 참여하면서 도서관 문화학교가 커졌습니다.

 

그때 아이들 글쓰기를 진행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저학년 고학년 합반을 했는데 인원도 많고 저학년 고학년 간에 생각의 차이가 커서 두 반으로 나누어 진행했습니다. 나중에는 시대 흐름에 맞추어 고학년 논술 반, 저학년 글쓰기 반으로 나뉘어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겨울 방학 전에는 작은 문집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나, 너, 우리」,「도서관, 나를 찾아가는 길」 등 홍천도서관 최초의 문집이 나왔습니다.

아이들 글짓기는 일기죠. 여러분, 일기를 어떻게 써요? 너무 틀에 맞추어 쓰게 됩니다. 그중에 하나가 반성조의 일기인데 저한테 묻습니다. ‘반성할 게 없어요.’

 

반성조의 일기는 아이들도 쓰기 싫어합니다. 잘못한 것을 쓰라고 하면 골라내기 힘들기 때문이죠. 맨 마지막 문장은 ‘내일은 참 잘해야겠다.’ 하는 문장인데, 이런 일기 형식은 버려야겠다, 지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이들과 야외수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아이들과 풀도 뽑아보고 아이들이 직접 맨져보고 (‘만져보고’의 홍천 사투리), 아이들이 직접 경험한 것을 글로 써보게 하였습니다. 글씨를 잘못 써도 칭찬해주고, 어떤 경우에는 아이스크림도 직접 사다가 나누어 먹으면서 쓰기도 했습니다. 여름에 몰래 얼음을 등에 넣어주는 등 장난하기도 하면서 그 표정 느낌 등을 쓰게 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시원하다고 느끼고 어떤 친구들은 울기도 합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대방에 대해서 어떤 미안함을 갖는지 생각하고 쓰도록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쓰지 않았습니다. 어른들도 쓰라고 하면 잘 못쓰는데 아이들이 못쓰는 것은 당연합니다. 금방 쉽게 써지나요? 못 씁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직접 체험한 것을 가지고 써보라고 하니 느낌 그대로 씁니다.

가을이 되면 밤을 주러 갑니다. 밤 껍데기에 나뭇가지를 꽂아서 스푼을 만들 수 있습니다. 숟가락을 만들어서 소꿉장난 놀이를 하는 세대가 아니지만 풀 뜯어다가 찧어서 만들어놓고 먹는 시늉을 하고 소꿉장난 놀이를 아이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수업시간은 약 1시간 30분 동안 이루어지는데, 1시간 활동하고 30분 글을 씁니다. 다 씁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니 자기 생각을 조금씩 쓰려고 하더라고요. 그럴 때 아이에게 맞는 책 한 권 골라서 읽어주고 나라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써 보라니까 그런대로 쓰게 도더라고요.

글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입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글이 될 수 없습니다.

 

생각이라는 것을 날마다 한 줄씩 쓴다고 했을 때, 열흘이 지나면 열 줄이 써집니다. 내 생각이 그만큼 열 줄까지 커졌다는 것입니다. 열 줄을 쓰면 12줄, 15줄도 쓸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시를 하루에 한 편씩 씁니다. 아침에 나오면서 썼습니다. <처서>는 가을이 든다는 절기죠. 벼가 더 이상 크지 않고 고개를 숙이는 시기라고 합니다. 날씨도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지고요. 지금부터 벼들이 영글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합니다.

 

 

<처서>라는 시 첫 줄을 이렇게 썼습니다.

‘누가 먼저 울었을까/ 숲이 매미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매미가 우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시간 맞춰 울어요. 어느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는데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면 온 마을 매미들이 다 나와서 웁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우는 매미가 있는가 하면, 어떤 애들은 쉭쉭쉭 우는 애들도 있습니다. 다양한 울음소리가 느껴집니다.

 

사실 이 핸드폰 안에는 40편의 시가 있다고 했는데요, 시를 쓴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루하루의 기록, 순간순간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조금 지나면 다르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저 녀석 밉다.’라고 생각했다가도 ‘미워하는 하는 내가 밉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글을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사람입니다. 제가 낸 시집 7권 중에서는 절판이 된 책이 4권 정도 있습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이사를 할 때는 손 없는 날을 택하여 이사를 했습니다. 음력 1일 2일은 동, 3일 4일은 남, 5일 6일은 서, 7일 8일은 북쪽을 피해 갔습니다. 그러나 9일 10일은 손 없는 날, 다시 말하면 귀신도 모르는 날이라 하여 이날 이사를 갔습니다.

 

달력마다 몇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일중에 대표적인 것은 안택이나 묘 자리 잡는 일을 하셨습니다. 안택 날을 잡아주면 담배 값이나 술이나 놓고 가는데, 그 재미로 집안일을 소홀히 하셨다는 겁니다. 특히 인근 마을에서 누가 돌아가셔서 지관이라고 묘 자리 봐주러 다녀오시면 주머니가 두둑하셨답니다. 그러면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맨날 술에 젖어 지내셨습니다. 한학을 하셨으니까 당연히 시를 짓고 창을 하곤 하셨는데 저도 어린 나이에 물이 들었나 봅니다. 옛날 사람들 노는 것이 멋스럽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마땅히 놀 것이 없어 할아버지의 삶을 통해 글도 써보고 한자 책도 들여다보고 그랬던 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시골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나눠져 있었습니다. 사랑채에서 읽는 할아버지 책과 안채에서 할머니가 읽으시는 책이 달랐습니다. 안채에는 한글로 된 장화홍련전, 흥부전, 춘향전 등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 책 읽는 거 들어보셨어요? 노래하듯 읽습니다. 누구 구성지게 읽으면 저녁마다 이야기책 들으려 모이기도 했습니다. 글이 이야기가 되고 노래가 되는 글. 저는 지금도 할머니께 읽어 드리던 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시를 쓴 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즉 글이 리듬이 되고 리듬이 노래가 된다고 여겨질 정도로 글 읽는 것이 저절로 몸에 베이게 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가 교직에 계셨었는데 처음 발령이 서석초등학교였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장롱 정리를 하시면서 낯선 옷 하나를 꺼내 보여주셨습니다. ‘느 아부지 교직 처음 발령받았을 때 내가 손수 지어준 바지다.’ 그것은 겨울 솜바지도 아니고, 하얀 옥양목을 손바느질로 지어 그렇게 해 입혔답니다.. 그 당시에 와이셔츠에 넥타이는 하나 있어야 하니까 손수 지으신 옷이라며 어머니는 간직하셨답니다.

 

그런, 오래된 것에 대한 관심과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관심은 시를 쓰는데 좋은 소재가 되었으며, 밤늦게 할머니가 책 읽는 모습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버지가 선생인 탓에 학교 근처에 관사가 있었습니다. 놀 때는 학교에서 놀고, 도서관에서 놀고(예전에는 학교 도서관이 많지 않았습니다) 과학실에서 놀았습니다. 토요일은 반공일이여서 학교 아이들이 오전 수업만 하고 집으로 가면 교실에 구석 앉아서 그림책 보거나 책을 읽고 그랬습니다. 그때부터 책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 같습니다.

초등 5학년, 6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 배웠던 악기가 풍금입니다. 노는 자리가 학교이다 보니까 허락받고 교실에 들어가서 여러 악기들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하모니카나 피리 멜로디언 등은 이렇게 저렇게 불어보다가 다루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학교마다 밴드부가 있었습니다. 옷도 예뻤습니다. 하모니카와 멜로디언, 리듬악기 등을 다루는 법을 알고 리듬감도 좋으니 전체적으로 어디가 잘 되었는지 잘 못 되는지 알 수 있어서 지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하면서 악기와 친해졌고, 자연스럽게 글에 리듬감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내 안의 글, 문학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책을 읽으면서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집에 가보면 대학교 때 써봤던 시도 어딘가에 쌓여있고, 누군가를 좋아해서 일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연애 시 편지도 있을 겁니다.

 

창작하는 사람은 남과 다른 나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면 새로운 것이 생겨날 수 없겠지요. 돌아보면 제가 살았던 시대는 목적 없이 살아가는 세대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떠나보기로 했습니다. 때로는 슬퍼서 때로는 우울해서.

 

여러분들도 한 번은 무작정 떠나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가다 보면 내가 보이고 가족이 보이고 친구가 보이고 세계가 보입니다. 어느 날은 내가 슬픔에 젖어서 가고 있는데 나보다 더 슬픈 사람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여행은 떠남입니다. 언제 어딘가로 가자고 정해놓고 가는 것은 여행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생각과 계획을 해 왔기에, 여행을 통하여 새로울 것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곳에 대한 정보를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무작정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이 많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슬픔 때문에 무작정 가다 보니 슬픔도 사라지고, 그곳에서 새로운 나를 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내가 여기까지 왜 왔나 싶을 때가 있었는데, 거기서 돌아가야지 하고 멈추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여행이란 내 안으로 가는 길입니다. 목적지를 두지 말고 멍하게 멍 때리며 오늘은 아무런 것도 없이 동쪽으로 가자, 이쪽으로 가자고 자신을 이끌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재밌는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귀여운 농담>이라는 시입니다.

 

강원도 홍천하고 동막골에 사는 내가

오랜만에 서울 가려고 이른 새벽부터 서두르고 있다

늙은 어머이는 새벽밥을 짓고

나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 머리를 감고

 

장농에 넣어 두었던 속내의도 꺼내 입고

장날에 새로 산 비니루 구두도 꺼내 닦는다

하루 세 번 오는 버스를 타러 고개를 너머 간다

어머이는 가면서 먹으라고 삶은 계란과 고구마를 싸 주신다

 

한 눈 팔지 말고 잘 댕겨 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서울은 멀다

아무리 잘 차려 입고 가도 몸에선 풀내가 난다

나는 갈 때마다 멀미를 한다

멀미는 멧새울음 같다

나도 멧새처럼 말투와 발걸음이 어수룩하다

어머이는 멀미가 나려하면 흙내를 맡으라고 하신다

서울 흙내를 맡으면 더 멀미가 나요 하면

비싸서 그럴 게야

하하 웃으신다

 

실제로 눈으로 보고서 쓴다고 하면 어린아이들에게는 안 나옵니다. 저도 시를 잘 쓰는 방법은 모릅니다. 그래서 많이 써 보는 것입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본 대로 쓰라는 것입니다. 컵이라고 해서 다 손잡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는 들리는 느낌 그대로 써 보라는 겁니다. 개구리가 우는 것은 개구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는 내 느낌으로 들립니다. 이처럼 시에서의 표현은 느낌대로 쓰는 것입니다.

언어화된 문자는 향기가 없지만 시로 쓴 문자는 향이 납니다. 고구마라는 단어를 볼 때는 느낌이 안 나지만 고구마가 길고 통통하고 구웠다고 쓰면 느낌이 살아날 것이다.

아이들한테 일기를 쓰라고 할 때 열심히 쓰라고 하지 말고 느낌대로 쓰라고 하세요. 이러한 느낌대로 하루하루 써 나아가다 보면 10줄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아이들과 더 가깝게 이야기를 하려면 책을 읽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아이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세요, 아이들은 책을 읽고 엄마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데 엄마들은 그것을 막습니다.

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예술가이고, 그 곁에 사랑하는 사람 가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시집을 7권 냈습니다. 어떻게 하면 홍천 사투리를 시어로 쓸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혹시 ‘준두가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홍천 사투리인데요. 바로 주둥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쓴 시를 읽으시면 ‘홍천에 이렇게 많은 사투리가 있나?’ 생각하실 겁니다. <그늘 지픈 질깔>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홍천 사투리를 시어로 썼습니다. ‘지픈’은 ‘깊다’, ‘질깔’은 ‘길’의 사투리입니다.

『말 주머니』라는 시집은 우수도서로 선정되어서 전국의 도서관에 진열 되어 있습니다. 시를 쓰는 것은 먼 길을 가는 나그네 갔습니다. 시인들의 꿈이 맘에 드는 시 한 편은 남기고 싶다는 겁니다. 아직 맘에 드는 시를 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쓰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30살에 시인이 되었습니다. 올해로 시인이 된 지 31년이 되었네요. 어느 날 아이들을 데리고 천문대를 갔었습니다. 천체 망원경으로 달도 보고 별도 보고 은하도 보고 성운도 보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젯밤 밤하늘에서 뭘 봤니?’ 물었더니 별은 안 보이고 캄캄한 하늘만 보인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만큼 아이들은 어른들과 시선이 다릅니다.

제도 백지 위에 시를 쓸 때는 캄캄합니다. 막막하지요. 쉽게 풀어내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것이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입니다. 엄마, 아빠, 형, 누나, 동생, 친구 등등 그리고 시간을 생각해봅니다. 방학, 청소할 때, 밥 먹을 때 등등 서로 연결해 봅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의 실마리가 보입니다.

처음이 어렵듯이 시를 쓰는 것도 처음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 까진 없습니다. 안 쓰면 되니까요. 그래도 써야 한다면 잘 쓰려고 하지 말고 막 써보는 겁니다.

 

시는 자신의 삶의 흔적입니다. 삶의 냄새가 나는 글이 참다운 글입니다. 고맙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