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행(5)- 윤동주의 고향 용정, 명동촌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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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행(5)- 윤동주의 고향 용정, 명동촌을 가다

평화/여행

by 함께평화 2016. 6. 2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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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을 가다. 

 

2시간여 버스를 타고 닿은 곳은 용정이다.

용정 시내로 들어가기전 가이드가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을 가리키며 차창밖을 보라고 한다. 시간상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나마 일송정을 보게 되었는데 못내 아쉬웠다. 가이드 얘기로는 일송정이 있던 비암산에는 소나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송정(一松亭)'이란 이름이 불리어진 것은 바위 벼랑끝에 두 아름도 넘는 소나무가 바위에 뿌리를 박고 있었는데 그 소나무의 모습이 마치 돌기둥에 푸른 청기와를 얹은 정자처럼 보인다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일송정에 모여 독립운동에 대한 방안들을 모색하였는데 일제가 일송정 줄기에 구멍을 뚫고 후춧가루를 넣고 봉해 버린 후 말라죽었다고 한다. 

 

시내에 들어서면서 가곡 '선구자'에 역시 나오는 두만강 물줄기인 '해란강'을 창밖을 통해 보았다. 일송정이나 해란강이나 그저 지금껏 별 느낌없었는데 독립운동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실감하기 시작한다. 이래서 현장을 직접 와봐야할 것 같다. 가이드와 전문가의 소개와 설명은 치열한 독립 열망을 갖고 피흘린 선조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라 없는, 조국 없는 백성들의 설움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새삼 나라와 조국의 중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용정은 약 26만여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이 중 조선족 비율이 67%정도 차지 한다고 한다.

우리는 먼저 윤동주의 시비와 역사전람관이 있는 용정학교를 방문하였다. 이곳은 민족시인 윤동주가 나온 학교는 아니지만 해방이후 근방의 여러 학교가 합쳐진 곳으로 윤동주 시인의 시비와 학교역사전람관이 있었다. 

아나운서 출신의 조선족 문화해설사 여성이 간드러지게 연변 사투리를 쓰면서 1900년대 초기 연변에서의 조선족 상황과 교육 활동 등을 소개 하였다. 아쉽게도 내부는 찍을 수가 없어서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기념관 1층에 마련한 윤동주가 공부하였던 교실을 재현해놓았고 칠판에는 윤동주의 '서시'에 노래말을 붙여놓은 악보가 그려져 있었다.

기념관에 판매하는 윤동주의 시에 노래말을 붙인 CD와 조선족 학교 역사와 관련된 책을 구입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이곳으로 오면서 먼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120여개가 넘는 서당 등 학교가 세워졌음을 알게 되었다. 거의 모든 교육기관에서는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을 가르치고 이러한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었다. 어느 시기나 교육이 중요하다. 당시가 민족교육과 독립이 주요한 시대적 과제였다면.. 지금 이 시대에 교육 과제는 무엇일지 새삼 고민하게 만든다.

 

 

'명동촌'에서 윤동주와 김약연을 만나다.

 

명동촌을 방문하였다. 올해 영화 '동주'가 나오면서 이곳이 더욱 유명해졌고 찾아오는 이들도 많아졌다 한다.

영화를 통해 윤동주와 그의 사촌 송몽규에 대한 관심과 재조명이 되었다. 윤동주야 모르는 이가 없겠지만 그의 고종사촌형이며 평생 동지라 할 수 있는 송몽규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많아서 그의 삶을 새롭게 조명받았다.

  

명동촌은 용정에서 약 15㎞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 등 네 집안이 1899년~1905년경에 집단으로 이주하여 형성된 곳으로 1910∼1920년대 북간도 지역 한인의 문화교육운동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규암 김약연 선생을 알게 되었던 것이 큰 의미가 있다. 김약연은 명동촌을 통하여 기울어 가는 조선의 운명을 바로 세울 인재를 기르고자 1901년에  ‘규암재(圭岩齋)’를 세웠다. 1908년에는 여러 서재를 합하여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세웠고, 1909년에 명동서숙이 명동학교로, 1910년에는 명동중학으로 바뀌었다. 명동학교 뿐만아니라 1911년에는 명동여학교가 설립되는 등 북간도 지역에서만 하더라도 100여개가 훨씬 넘는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민족교육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김약연 선생 등이 1909년에 명동교회를 세웠는데 이를 계기로 명동촌은 유교 공동체 사회에서 근대 기독교 문화 공동체로 변화하였다고 한다. 김약연 선생의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글귀를 보면서 그가 얼마나 삶을 치열하고 올곧게 살았을지가 짐작되었다.


현재 용정시 정부는 명동촌을 중국 조선족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관광명소로 건설하고 있다. 2011년에는 명동학교를 복원하였고, 2012년 8월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의 생가’라는 이름으로 윤동주 생가와 명동교회를 포함한 주변 지역을 단장하였다. 또한 명동학교터에도 비석이 남아있었는데 아마도 복원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는 듯 사람들이 분주하였다. 영화 '동주'때문인지는 아니면 이곳에서는 송몽규에 대한 더한 그리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송몽규의 생가도 복원되어 있었다.

명동촌에서는 송몽규의 사촌동생뻘 된다고 하는 분이 친히 안내와 소개를 해주었다. 명동촌에서는 하얼빈 이등방문을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잠시 머물면서 거사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세월은 지났어도 안중근 의사가 권총연습을 하던 모습을 지켜 보았을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말없이 서있다.  

 

 

연길(延吉, 옌지)

 

용정과 명동촌을 둘러보고 연길로 이동을 하였다.

연길은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도이다. 자치주에는 옌지(延吉 연길), 투먼(图门 도문), 둔화([敦化 돈화), 룽징(龙井 용정), 훈춘(珲春 훈춘), 허룽(和龙 화룡)등의 도시가 포함되어 있다.  연변지역은 조선 후기부터 우리 선조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한 땅이다. 특히 일제강점기때는 독립 운동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연변에는 약 220만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데 조선족은 약 60여만명 된다고 한다. 조선족의 인구는 한중 수교이후 한국으로 빠져나가는 등 해마다 줄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칫 조선족자치주의 명분마저도 위협받을 수 있을 듯 하다.

 

조선족 청년인 가이드는 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며칠전보다 기분이 업되어 있는 상태다. 

연길 시내의 모습은 용정이나 다른 곳보다 더큰 규모의 건물이 보이고 특히 시진핑 주석이 작년에 다녀가면서 더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는 연길에서의 버스안에서 '연길 방문 환영의 인사'를 깍듯이 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족에 대한 왜곡되고 편견을 버려달라고 한다. 보이스피싱 등 몇몇 조선족 사람들이 조선족 전체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대부분의 조선족 사람들의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으로 자부심과 자존심을 갖고 있기에 부정적 편견에 대한 억울함이 있다고 한다.

 

가이드로부터 연변에 조선족이 살게 된 역사적 상황과 일제 강점기때의 독립운동,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의 애달픔과 서러움 등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여러 실질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이들이 겪었어야할 그리고 겪을 일들을 생각해보면서 잔잔한 동포로서의 안타까움이 일어났다. 특히 나라잃은 설움과 고통, 독립을 위한 선조들의 피흘림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이어지고 있는 여러 상황들에 정부가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연변 어디를 가든지 간판에서 한글을 쓰여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조례로 한글을 먼저 명기하고 한자를 병행해야 한다는 규칙이 들어 있다고 한다.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이 무척 강하다는 걸 반증하지 않나 싶다.

 

일제강점기때 연길은 독립운동의 근거지 였다. 김좌진, 홍범도, 김원봉 등이 이곳에서 활동하였으며, 김일성도 이곳에서 공부하고 백두산 주변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홍범도는 기독교계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김좌진은 대종교에서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의사와 열사, 애국 지사와 순국선열의 차이?

 

그동안 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사용하였었던 의사, 열사, 지사, 선열 등의 말에 대한 뜻을 알게 되었다.

의사는 무력을 통하여 항거하며 의롭게 죽은 사람을 말하며, 열사는 맨 몸으로 자신의 지조를 지키며 저항한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애국지사는 일제강점기때 독립을 위해 항거한 사실이 있는 사람을 말하며, 순국선열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사람을 말한다고 한다.

 

 

조선족 집과 한족의 집 차이?

 

용정과 명동촌, 연길을 오고가면서 차창가로 보이는 집들이 조금씩 달라보인다. 일행으로 부터 차이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특별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지붕모양이었다. 조선족의 집은 우리의 전통가옥방식대로 기와나 지붕이 벽으로부터 처마를 이루고 있으며 팔작지붕형태이다. 특히 조선족집의 벽 색깔은 주로 흰색 회칠을 많이 사용하는데 배달민족의 전통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고 한다. 이에비해 중국 한족의 집은 처마가 없이 벽과 지붕이 맞닿아 있다. 

 

평화기행 초반에는 수시간 오랫동안 차를 탔었지만 백두산 등반 이후부터는 그렇게 차를 오래 타지는 않는 일정이다.

백두산을 기점으로 북쪽으로 흐르는 두만강을 따라 북,중,러의 접경지역까지 가게 된다.

오늘 머무를 곳은 연길 시내의 호텔이다. 연길역 주변에 위치해 있는데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도시 야경이 화려하다.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중국은 주로 노동자문화가 발달되었다면 러시아쪽은 주로 먹고 즐기는 문화가 발달되었다고 한다. 북한은 러시아쪽 영향을 받아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나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새 평화기행이 막바지에 접어든다.

처음 압록강 건너 백두산에서 내려다보면서 멀찌감치 보이던 북한땅을 바라보던 긴장감과 설레임은 조금 누그러졌다. 마음이 무디어지는 것일까? 북한 식당 종업원 집단 탈출로 인한 경계와 긴장감은 덜하지만 분단의 아픔과 민족 역사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마음속 한켠에 더 사무친다. 

 

 

조선족과 한족의 지붕 차이?

 

멀리 일송정이 보인다.

 

해란강~

 

 

용정중학교

 

용정학교 기념관

 

 

용정중학교(구 대상중학교)

 

윤동주의 서시에 노랫말을 붙였다.

 

별의 시인 윤동주 상

 

 

명동촌 입구쪽의 선바위

 

항일 운동을 하다가 수없이 쓰러져간 애국지사들을 위한 기념비

 

 

 

 

규암 김약연 선생 기념비

 

 

명동교회 실내 모습

 

 

윤동주 생가

 

 

 

명동교회 모습

 

송몽규가 살던 집

 

 

연길을 가면서 들른 화장실~~~

 

 

산삼~~

 

산삼~~

 

휴게실에서 백사(白蛇)를 보다~~~

 

연길역

 

연길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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