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기행(3) 집안에서 송강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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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행(3) 집안에서 송강하까지

평화/여행

by 함께평화 2016. 6. 1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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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가이드가 호텔 근처에서 밤늦게 개인 활동을 자제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지난번 집단 탈북문제로 국경지대에 상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는 말을 곁들였다. 안그래도 평화기행오기전 여러사람이 불안한 눈초리로 굳이 이러한 때 가야하는지에 대한 우려도 들었다.

 

집안 인근은 북한의 만포시와 접하여 있다. 차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서서히 몸도 지쳤던지 어젯밤에는 눕자마자 곤하게 깊이 잠들었던 탓에 아침에는 몸이 개운하였다. 

 

집안 호텔에서 8시경에 출발하여 광개토태왕비와 릉, 그리고 장군총 등을 둘러보는 일정이 잡혀 있다.

 

 

집안(集安)

 

집안은(集安) 중국 길림성 동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면서 졸본성(卒本城)을 도성을 삼았지만 서기 3년, 2대왕인 유리왕이 이곳 집안으로 수도를 옮겨왔다. 우리에게는 국내성으로 알려진 곳이다.  427년 장수왕이 평양천도할 때까지 약 400년간 이곳은 고구려 도성이었다.

산으로 둘러쌓인 넓다란 분지 형태, 그리고 뒷편으로 우뚝 솟은 산이 있어 외적 침입에도 잘 방어할 수 있는 곳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 곳곳에 고구려의 700년의 역사적 흔적들이 고스란히 많이 남아 있지만 고구려 멸망후 1200여 년간 폐허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가 1902년 청나라 말기에 잡안현(辑安县)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흔적들이 조금씩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한다. 집안 지역의 고구려 유적은 2004년 압록강 건너에 있는 북한 고구려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고구려성과 중국성의 차이점에 대해 들었다. 중국성이 주로 벽돌을 구워 성을 쌓는 방식이라면 고구려성은 큰 바위를 주축으로하여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린 것이 특징이다. 잘 모르긴해도 그러한 이유때문인지 고구려성은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튼튼하고 잘 보존이 되어 있는 듯 하다.  남아 있는 성을 지역 사람들이 이어서 집을 짓기도하고 관리는 잘 되고 있지 않다가 최근에서야 보존 계획을 세워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그저 안타깝다. 특히 400년간의 고구려 도성으로서 국내성이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성문을 옹문으로 둘러 쌓여 있기에 적들이 성문을 뚫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광개토태왕비 와 태왕릉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19대 임금이다. 호태왕으로도 불렸는데 고구려 영토 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여느 임금을 그저 왕이라 부르는데 비해 태왕(太王) 이라 불리운 것은 그의 공과 업적이 대단했음을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호태왕을 기려 '광개토태왕비'를 세웠다. 비석은 높이가 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돌기둥에 총 1,775개 문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고구려 건국 초기의 역사와 광개토태왕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비석 뒷방향으로 광개토태왕릉이 있다. 세월때문인지 많이 무너져 내려 있고 훼손되어 있음이 안타까웠다. 관광상품을 활용하기 위해서인지 지금 무덤 주변을 단장하고 꾸미고 있었다. 릉의 특징은 무덤이 지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릉의 상단에 안치하도록 되어 있다. 숱한 전쟁을 치루면서 용맹한 기세로 대륙을 다스렸을 광개토대왕이었지만 죽음앞에서는 영원할 수 없었다. 당시 릉을 지키기 위하여 300명의 지킴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전체 무덤크기는 컸지만 채 두평도 안되 보이는 안치공간을 보니 인생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버스안에서 가이드가 퀴즈를 낸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무덤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답은 '등소평'이라고 한다. 그는 죽어 화장을 하여 중국 곳곳에 뿌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중국땅 만큼의 무덤인셈이다...^^ 

 

 

장군총


릉과 묘, 총의 차이- 보통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임금의 묘를 '릉'이라하고, 그렇지 않은경우 임금이나 장군일 것이라는 추측하여 보통 '총'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묘라고 부른다.

 

장군총이라 이름하는 것도 장수왕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안내판에는 '장군총'으로, 그리고 근처 다른 안내판에는 '장수왕릉'으로 적혀 있다. 우리는 장수왕릉이라고 믿고 있다. 

 

장수왕릉은 고구려 20대 임금인 장수왕의 무덤이다. 장수왕은 이름처럼 97세까지 장수하였으며 79년간 재위하였는데 릉은 4세기말에서 5세기 초에 건축되었다한다. 특히 릉은 장수왕이 살아있으면서 태왕릉과 본인의 릉을 만들었고 평양천도이후 죽고나서 이곳으로 시신을 옮겨왔다고 한다.

 

장군총은 동방의 피라미드로 불리는데 대리석을 계단식으로 한층 한층 쌓아 올린 7층 돌무덤이다. 그 중 가장 큰 대리석은 길이 6미터, 너비 1미터, 높이 1미터이며 무게가 32톤에 달한다고 한다. 7층이 모두 정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특징은 위에 얹어놓은 대리석이 밀려나지 않도록 밑 대리석 윗부분에 홈을 파두었다. 또한 무덤이 전체적으로 바깥으로 밀려나 허물어지지 않도록 큰 바위를 각 면마다 세워두었다. 안타깝기는 뒷쪽에 세워두었던 돌이, 안내자의 말에 따르면 일제 시대때 없어졌다고 하는데... 여하튼 돌이 없어져 무덤 그쪽 부분이 점점 밀려 허물어 지고 있는 모습을 확연하게 볼 수 있었다. 

 

광개토왕릉비와 장군총 주변으로 많은 고분도 발견되었다. 왕릉이 피라미드 형태의 돌을 쌓아 윗부분에 시신을 안장시켰는데 반해 여느 다른 무덤들은 시신을 지하에 묻고 고분을 만들어 놓은것이 차이가 있다. 이러한 방식이 같은 시기 또는 같은 장례 문화인지는 사실 의문이 들기는 하다.

 

우산귀족묘지에 들렀다. 당초 계획은 없었으나 이곳까지 와서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보았으면 하는 분들이 많아 일정에 넣었다.

고분은 관리를 위해 매년 하나씩 개방을 한다고 한다. 4호분인가.. 하는 고분에 들어갔다. 차갑게 피부에 닿는 습기를 느끼며 지하를 조금 들어가니 시신을 둘 수 있는 돌이 두개 놓여져 있다. 아마도 부부의 시신을 두었던 게 아닌가 싶다. 무덤내에서는 카메라를 찍을 수 없어 후레쉬를 비추며 설명하는 안내자의 말을 들어야 했다.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이 바로 삼족오였다. 그리고 네면에는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사신과 여러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윗면에는 가장자리로 큰 돌을 엇갈려 서로 지탱하도록 두었고 환기를 위했던지 작은 구멍의 흔적이 있었다. 1500여년이나 지났음에도 바래기는 했지만 그림의 채색이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통화시를 거쳐 '송강하'로...


12시경에 집안을 떠나 이제 백두산을 가기위해 중간에 들른 곳이 길림성 통화시다. 북한의 자강도와 근접해 있는 통화시는  인구 200만정도의 거점도시이며 비류수가 흐르는 도시이다. 이곳의 3가지 유명한 것이 있는데 바로 강철, 포도주, 제약회사가 많다는 것이다. 제약회사가 많은 것은 근처에 백두산의 자연 약초가 많기때문이다.

 

점심으로 삼겹살을 먹었다. 백두산을 가기 위해 통화시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곳곳에 한국어로 된 간판이 많이 보였고 우리가 들어간 식당은 삼겹살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다.

 

당초 압록강을 따라 가는 평화기행코스의 일정을 잡았지만 워낙에 차타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통화시에서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백산을 거쳐 송강하로 가기로 하였다.

 

송강하 가는동안 버스안에서 참가자들의 개인소개와 더불어 평화기행에 참여한 이유와 얻고자 하는 것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35명의 참가자들 각자각자마다의 인생관과 참가 이유를 들으며 좋은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모두들 대단하고 또렷한 평화기행의 목적을 간직하고 있어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여행 마치는 날까지 모두의 소원들이 잘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

 

내일이면 기대하던 백두산을 보게된다. 무엇보다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하루에도 102번이 날씨 변화가 보이는 산이 '백두산'이라고 한다. 그만큼 온전한 백두산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어렸을때 꿈속에서 백두산을 다녀온 꿈을 꾸었었다. 꿈에서는 백두산 꼭대기에서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꿈이었는데.... 여하튼 꿈꾸었던 것이 현실? 앞으로 다가왔다.

 

중국사람들이 갖고 있는 3가지의 꿈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배워도 배워도 다 배울 수 없는 중국말이다. 왜냐하면 워낙에 소수민족들이 많아서 언어가 다르기때문이다. 두번째로는 먹어도 먹어도 다 먹어볼 수 없는 중국음식이라 한다. 세번째는 다녀도 다녀도 다 다녀볼 수 없는 중국땅이라고 한다.

 


 

 

 

 

 

광개토태왕비

 

 

 

태왕릉 가는 길..

 

태왕릉위에서 내려다 본 마을의 모습

 

릉의 윗부분..안치하였던 묘로 들어가는 문

 

 

 

릉이 밀려나지 않도록 큰 돌을 기대어 놓았다.

 

 

 

 

우산귀족묘지와 환도산성 가는 길

 

장군총.. 장수왕릉이다. 대리석으로 쌓아올린 동양의 피라미드로 불린다. 큰돌을 기대어 무덤이 밀려나지 않도록 지탱하고 있다.

 

위에 놓여진 돌이 밀리지 않도록 홈을 파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대 놓았던 돌이 없어지자 밀려나오는 보습을 볼 수 있다.

 

 

 

가는 곳마다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정권이라고 표기하는 모습이 답답하고 안타깝네요.

 

 

 

 

통화시에서 만난 삼발차

 

고구려 휴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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