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혁명 120주년, 마지막 격전지 서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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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농민혁명 120주년, 마지막 격전지 서석에서

평화/여행

by 함께평화 2014. 7. 19.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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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결에 홍천문인협회를 따라 서석지역으로 문학기행을 떠났다.

아니 문학기행이라기 보다는 문화여행이라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싶다.

며칠전 문인협회 회장과 첫 대면을 하고 이야기 마무리에 행사 소개와 초청을 마다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었는데..뭔가에 이끌리다시피하며 문인들과 함께 서석 여행길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은 홍천군 서석면 지역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동학혁명 발발 120년이 되는 올해, 서석은 동학혁명의 마지막 격전지로 알려져 있기에.. 기대를 가지고 참가하였다.^^ 

 

서석면

근대문화제로 지정된 홍천미술관앞에서 문화기행에 참가한 문인협회 회원들과 만나 간단히 소개하고서는 차에 올라 첫번째 목적지인 서석면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서석면장으로부터 서석지역에 대한 간단한 문화와 역사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워낙에 이런저런 서석에 관한 내용을 잘 알고 열정적으로 말씀하시기에 물어보니 서석출신이라 하신다. 

서석은 인제, 횡성, 평창과 접하고 있으며 해발 310m이상의 준산간 고랭지 지역으로 수리시설이 잘 발달되어 오대쌀과 더불어 오이, 호박, 고추, 인삼(장뇌), 찰옥수수 등이 유명하며, 특히 홍천의 맑은 물과 옥수수를 원료로 빚은 옥선주(명인제24호)가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자연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다.

 

 

마리소리골악기박물관

이어서 방문한 곳은 '마리소리골악기박물관'이다.

이곳은 올해만 세번째 방문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낯설지가 않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박물관을 소개하는 문화해설사와도 니 이제는 제법 서로 아는척하며 인사도 나눈다. 박물관은 한국전통 음악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전통음악에 대한 이해와 지식습득의 산실역할을 위하여 2005년 착수하여 2007년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악기박물관이다.  이곳은 서원대학교 교수인 이병욱 교수가 땅을 기증하고 홍천군에서 건물을 지었다.

'마리'는 마루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가야금, 거문고, 대금, 편종 등의 국악기 70여점과 안골륭, 콘트라베이스, 칸들  등의 서양악기 32점 등이 시대별로 분야별로 분류되어 전시되어 있으며, 때때로 공연과 연주 체험도 해볼 수 있다.  

어쩌면 대학이 없는 홍천에 '음악'과 관련 특성화 대학(원)교가 생기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지난번 두번째 방문하였을때 이탈리아에서 성악가 조수미가 유학하였던 대학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삼신산 서봉사

마리소리골악기박물관에서 되돌아나오면서 '삼신산 서봉사'를 들렀다. 이 사찰은 이임순 보살이 젊은 나이에 불료에 입문하여 1960년대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다. 

이 절의 특징은 여덟 산신 즉 금강산, 묘향산, 구월산, 지리산, 계룡산, 삼신산, 백두산, 삼각산에 있는 산신을 믿는 토속신앙과 더불어 불교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배타적이지 않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존중하는 모습들..

 

동학혁명위령탑/ 진등/ 자작고개

서석은 고종 31년(1894) 반봉건(反封建)·반침략(反侵略)의 기치하에 조선 봉건사회해체기의 제문제를 변혁하려 했던 농민들의 사회개혁운동인 동학농민운동의 마지막 격전지였다고 한다. 1976년 새마을 정비사업을 하던중 발견된 유골을 조사한 한 결과 동학군의 유해라는 것을 알고 마을사람들이 쌀 한 말 씩을 모으고 홍천군에서 보조를 해 건립하였다.

 

함께했던 문인들중 오랫동안 조사하고 문화해설의 경험을 갖고 계신분으로부터 이곳의 아픈 과거와 역사를 잘 알게되었다.   

 

동학혁명 당시 내촌면의 물걸리 동창, 화촌면 장평, 서석면 풍암 등은 홍천의 주요 전투지였다. 마지막 대 격전지였던  풍암리 전투에서 신식무기로 무장한 관군에 의하여 희생당한 농민군 등은 800여 명에서 1,0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지명유래도 동학군이 진을 쳤다 하여 진등이라 불렀고, ‘자작고개’는  ‘동학 난리’때 사람들이 자작자작 넘어가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하여 또한 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흥건했다하여 붙여졌다고 하고 싸우다 죽은 농민군 시체를 진등에 묻었는데 시체가 썩어 땅이 내려앉으면서 잦아진 고개라 하여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아픈 역사를 들으며 어느 한곳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이 내게 말을 거는 듯 하다. 

특히 올해가 갑오농민운동의 120주년이 되는 해가 아닌가? 갑오농민혁명의 정신과 의미를 다시한번 되새겨야 본다.

 

김학균 가옥(金學均 家屋)

문화재자료 제 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1913년 서석의 부호였던 엄근호가 건축하고 45년간 살던 집으로 ㄱ 자 형태의 안채와 ㄴ 자 형태의 사랑채가 조합배치되어 ㅁ 자 형태의 취하고 있는 전통가옥이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 출입 대문을 분리하였고 그 사이 좁은 안마당에도 담장을 설치하여 남녀가 쓰는 공간을 따로 나누어 놓았다고 한다.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현재 살고 있는 주인은 리모델링 하고 싶어도 함부로 개보수를 못하는 안타까움을 우리에게 넔두리로 내뱉는다. 문화재청이나 관에서 이 집을 매입하여 제대로 관리를 하던지, 제대로 지원하던지 하여야 하는 것 아닌가? 

 

 

미약골

미약골은 400리길 홍천강의 발원지이며 전국 어느 강과는 다르게 지역의 이름으로 따 붙여진 강이 바로 '홍천강'이다. 그도그럴것이  홍천강은 홍천지역을 벗어나지 않은채 오직 홍천지역안에서만 흐르다 한강과 청평댐으로 유입되고 있다. 옛날 이곳을 지나던 풍수가가 지세를 둘러보고 삼정승 6판서가 나올 명당자리가 있어 학이 울고 '촛대바위가 아름답게 치솟았으며 선녀가 하강하여 목욕을 했다는 암석폭포 등 바위들이 각기 아름다운 형상을 이루고 있어 미암동 또는 미약골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마지막 코스로 찾아가 입구쪽만 보려다가 몇몇과 함께 폭포까지 마치 원시림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자연생태가 잘 보존되고 아름다 곳이다.갔다. 작은 폭포였지만 시인의 마음에는 원고지로, 음악가에게는 오선지로, 미술가에게는 한폭의 도화지로 보였을게 다름없다.

 

되돌아오면서

서석여행을 마치면서 내촌방향으로 돌아 나오다가 도로가의 약수터에서 잠깐 쉬었다. 도로가 까페(?)에서 옥수수막걸리 한사발 건네는걸 차마 거절 못하고 한모금 마셨다. 날씨는 좋고 하룻동안이지만 지역을 탐방하며 보고 들었던 모습들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한나절동안 서석을 살피기는 하였어도 제대로 서석을 알기에는 역부족이지만 그럼에도 서석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다소 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특히 문인들과 함께해서 그런지 색다른 느낌, 행복한 여행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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