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선생의 꿈이음!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된다.”
- 1907년 4월. 서울 종로의 YMCA 강연에서 젊은이들에게 -
한서(翰西) 남궁억 선생(1863.12.27.~1939.4.5.)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언론인, 그리고 YMCA이사, 무궁화보급운동을 펼치셨던 분이다.
선생은 세계의 변화 흐름을 읽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학교로서 영어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된 '동문학'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이후 내부주사로 임관되어 고종의 영어 통역관으로 활동하였으며 또한 내부 토목국장으로 임명되어 종로와 정동 일대 도로정비와 탑골공원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칠곡부사와 성주목사, 양양군수를 지내는 등 구한말 행정 관료로서 어떠한 부조리와 비리에도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공직에 임하였으며, 서구와 일본의 세력에 쓰러져 가던 암울한 시기에도 굴하지 않고 언론, 신앙, 교육, 사회운동을 통한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YMCA운동을 전개하다.
남궁억 선생은 조선의 자유민주정신을 위하여 1896년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수석총무 등 중책을 맡았으며, 이후 만민공동회운동을 주도했다. 뿐만아니라 이상재, 서재필, 윤치호 선생 등과도 관계하면서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창립이후 적극적으로 회원과 이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특히 1913년 한국Y 대표로 한일Y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는 등 1918년 서울을 떠나 홍천으로 낙향을 할때까지 오로지 YMCA에 몸담아 민중계몽에 힘썼던 것이다.
언론과 교육운동을 펼치다
선생은 국한문 혼용 신문으로 우리나라의 최초의 일간신문인 '황성신문'의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협회 창립 및 관동학회 설립 등 애국계몽운동과 사회문화운동에 헌신하였다. 황성신문 사장시절 1902년 러시아와 한반도 분할안 토의를 통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갖고 있음을 폭로한 일로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사장직도 사임하게 된다.
또한 선생은 1895년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의 교사로, 그리고 일제의 주도하에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인재양성을 위하여 1906년 강원도 양양 군수로 있으면서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운동을 널리 펴기 위하여 ‘교육월보’를 창간하면서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근인은 국민의 지식에 달려 있고, 국민의 지식은 교육에 있나니, 교육은 나라를 문명케 하고 부강케 하는 기관이다.” 라며 국권회복의 길은 오직 교육 밖에 없음을 역설하였다.
관직을 내려놓은 이후 1910년에는 서울 배화학당(培花學堂)의 교사로, 1912년에는 상동청년학원의 원장 겸 교사로, 1918년부터 강원도 홍천군 보리울에 낙향한뒤 모곡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운동에 온 힘을 쏟으셨다.
지역에서 꿈을 펼치다
선생은 일제의 탄압과 고문으로 인하여 56세가 되던 1918년 몸을 회복시키고자 선향인 홍천 보리울(모곡)로 낙향을 한다. 그렇지만 보리울에서의 활동은 선생의 이상과 꿈을 펼치는 무대가 되었으며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무궁화를 심어 전국으로 보급하고, 농촌을 계몽하고 항일투쟁과 민족운동을 더 활발하게 이어가게 된다.
또한 우리 민족정신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는 상징물이 무궁화보다 달리 없다고 생각한 선생은 무궁화 밭을 일구어 많은 무궁화 묘목을 길러서 나누어주고 무궁화 노래를 지어 널리 퍼뜨리는 등 민족정신을 일깨우는데 온 힘을 쏟는다.
선생의 지치지 않는 민족혼과 정신은 1922년 9월 마태복음 9장 35∼38절을 묵상하고 드린 기도문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는 기물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젊어서 가진 애국심을 아무리 혹독한 일제치하 일지라도 변절하지 않고 육으로 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를 한 다음 지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란 시는 찬송가로 채택이 되어 오늘날까지 불리우고 있다.
선생은 1933년 일본이 날조한 소위 '십자가당 사건에 연루되어 71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1936년 옥중에서 병들어 보석으로 석방되지만 병중에서도 선생은 청년들에게 "나는 독립을 위하여 일하다가 가겠지만 너희는 반드시 독립을 볼 것이니 독립 후의 일을 위하여 준비해야만 한다네. 우리가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설령 오늘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닐세" 하며 독립을 확신하고 독립 이후의 철저한 준비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숙원하던 독립을 보지 못한채 선생은 1939년 4월 5일 소천하면서도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마고 나무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한서의 꿈은 이어져야 한다.
남궁억 선생은 암울한 시기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민족독립운동을 펼쳤으며, 교육운동을 통한 지도력양성을, 그리고 신앙운동과 사회계몽운동, 무궁화보급운동을 통한 민족정신과 주체성을 일깨우므로 사랑과 정의, 생명과 평화의 세상, 바로 YMCA운동을 일생 펼치셨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서가 떠난지 75년이 지났지만 그가 꿈꾸고 펼쳐나갔던 시대정신과 손수 실천하셨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생에 대한 연구나 평가가 미흡한 상태이다.
한서의 꿈을 펼쳐 나갔던 홍천과 인접하고 있는 춘천YMCA는 이미 홍천수련관을 운영하고 있다. 늦은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선생의 정신과 리더십을 연구하고 교육하고 훈련하며, 한서의 다하지 못한 꿈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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