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김홍규 총무, YMCA와의 만남
1962년 3월 열악한 상황을 견디다 못한 김형두 총무가 사임을 하고 난후, 공석이 된 총무에 신민현 이사를 임명했으나 역시 얼마 있다가 그도 사임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춘천 YMCA는 같은 해 11월 20일 김홍규 총무를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김홍규 총무와의 인터뷰 우리 사회는 196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사, 농, 공, 상의 사회적 신분의 계급의식에서 탈피하지 못한 시절이었기에 돈 많은 기업가보다는 비록 가난하지만 관직에 있는 사람을 더 존경했다. 그런고로 아침마다 출근길에 산뜻한 넥타이에 깔끔한 신사복 차림으로 단장한 사람들이 도청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시민들에겐 동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문화 속에 함께 사는 나도 이와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주)한국전력이 지정한 합자회사에 적을 두고 있었다. 내가 YMCA와 인연을 맺은 것은 전 김형두 총무의 권유로 회원이 된 1958년부터였다. 1961년에 이사로 선입되었고, 다음해 총무의 부탁으로 무보수 협력자로 실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때의 YMCA는 6,25 수복 후라 운영이 퍽 어려웠고 5남매 자녀를 둔 김형두 총무의 생활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누구 한사람 십일조 헌금을 내는 사람도 없었고 감사헌금 내는 사람도 없었으며 회원의 년 회비는 항목만 있을 뿐 모든 것을 총무의 책임으로 자체 프로그램을 통해 운영하여야 하는 곳이 YMCA이었다. 견디다 못한 김형두 총무께서 1962년 3월경 자진사임 하므로 총무가 공석이 되었고 이사회에서 후임으로 신민현 이사를 선임하였으나 20일후 자기에겐 적성이 아니라며 사퇴를 하고 후임으로 나를 천거하였다. 얼떨결에 이사회의 결의를 거처 졸지에 총무가 된 나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명으로 믿고 순종하기로 하였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와 평생을 무보수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망의 기도를 드렸다. 춘천YMCA는 1949년 2월 21일 창립되어 한때 평신도 운동을 비롯해 사회체육, 문화 활동, 자선, 재해복구사업 등 지역에 유일한 민간단체로서 사회봉사의 심벌로 불리고 있었다. 한편 회관도 중앙로 1가(현 농지 개발공사 자리)에 대지 20여 평에 2층 건물(약40평)이 있었으나 회관을 매각하고 그 자금으로 타자학원을 임대건물에서 하였다가 학원 운영이 부진하여 매각 자금 전부를 소진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엉덩이 붙일 의자하나 놀 곳 없고 YMCA 직인은 총무의 포켓 안에 있어 총무 가는 곳이 곧 YMCA요, 회관이었다. YMCA의 지식이 전혀 없는 문외한이기에 YMCA에 관련된 서적들을 탐독하고 서울Y를 비롯하여 타 YMCA의 모습을 견학도 하면서 사회사업학문을 전공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밤낮을 불구하고 동분서주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무보수로 봉사하는 것을 퍽 귀히 여기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칭찬과 격려의 말을 들을 때 마다 하나님을 향한 소명감은 더욱 강해졌고 나의 눈에는 YMCA 외에는 아무것도 안중에 없었다. 오직 YMCA만이 내 생애의 전부인양 싶었다. 더욱이 무보수 헌신이야 말로 하나님을 위한 최고의 봉사라고 여기며 보람과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뜻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한가정의 아비의 구실과 주의 종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에는 능력의 한계가 있었다. 끝내 나의 소원은 이루지를 못하고 그 후 효자동 회관을 준공한 2년 후인 1987년부터 1996년 6월 사임하기까지 YMCA 규정에 의한 품삯을 받는 일꾼이 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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