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YMCA의 영원한 총무, 영원한 청년- 김홍규
신덕진 (춘천YMCA)
춘천YMCA에서 34년간 열정적으로 헌신하신 김홍규 총무(1962.11.1 ~ 1996.6.30)는 Y운동가이자 조직가요 활동가로서 춘천YMCA의 69년의 역사에서 초석을 다지고 기둥을 세운 혁혁한 공로자이다. 2017년 5월 2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늘 YMCA를 위한 기도와 늘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YMCA가 감당해야할 역할과 방향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김홍규 총무는 특히 탁월한 국제적 감각으로 일본, 말레이시아, 대만, 싱가포르,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다지고 한국YMCA 국제 관계부문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나는 1992년 김홍규 총무께 면접을 받고 춘천YMCA에 발을 들여 놓았다. 물론 대학교 3학년부터 춘천YMCA 자원봉사자로서 활동을 하면서 늘 김 총무님의 자상함과 열정을 보아왔던 터였다. 김총무님께서 1996년 6월 정년퇴임하시기까지 그리 길지 않은 4년여 기간동안 간사로서 모시면서 Y운동을 배웠다. 그 기간동안 그로부터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통찰력과 지역에서 인적자원과 사회적자원을 어떻게 발굴하고 조직하여 Y운동을 전개해 나가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김 총무님은 나에게 Y운동을 가르쳐 주신 스승이자 멘토로써 늘 마음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짧은 지면을 통해 김총무님께서 Y에 남기신 흔적을 나누고자 한다.
김총무님과 YMCA와의 인연
김홍규 총무는 군복무를 마치고 1958년부터 춘천YMCA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 이사로 선임되었고 그 다음해 1962년에는 무보수 실무자로 직간접적으로 활동에 참여하였다. 1949년 2월 21일 창립된 춘천YMCA는 한국전쟁 이후 더욱 재정적으로 환경적으로 어렵게 되자 지속적으로 총무직을 감당할 수 없었고 공석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1962년 당시 총무의 급작스런 사퇴로 몇 개월째 공석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사회에서 그의 재능과 활동을 믿고 제7대 춘천YMCA 총무로 선임하였다. 김홍규 총무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드리면서 평생 무보수로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망의 기도를 드렸다.”고 말씀하셨다. 평신도운동체인 YMCA운동의 전문사역자로 출발하면서 본인 스스로는 하나님나라 확장에 대한 청지기적 사명감과 충성감을 다졌겠지만 사실 그의 가족들은 경제적으로나 가정 환경적으로도 말할 수 없는 어렵고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김홍규 총무는 1987년 춘천YMCA 효자동 회관이 준공될 때까지 거의 무모수로 활동을 하였다. ‘무보수 헌신’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한 최고의 봉사라 여기고 보람과 기쁨으로 받아 들였던 것 같다.
강원도 최초의 민간단체로 창립된 춘천YMCA는 한국전쟁이후 자선활동, 재해복구사업 등 사회봉사 활동을 전개하는 유일한 단체였다. 그러나 자체 회관조차 없이 재정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김홍규 총무는 꿋꿋이 YMCA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자체 회관은 없었지만 김 총무는 늘 가슴 안주머니에 YMCA 직인을 넣고 다니면서 “내가 가는 곳 어느 곳이나 YMCA회관이다”라며 지역 사회 곳곳을 누비며 Y운동을 펼쳤다.
김총무는 Y회원으로 참여하다가 갑작스런 총무직을 맡으면서 먼저 전문성을 키우고 YMCA 목적과 운동을 이해하고자 Y관련 서적을 탐독하였다. 또한 서울YMCA 등 타 YMCA를 견학하면서 Y운동을 배웠다. 또한 학문적으로도 ‘사회사업학’을 전공하면서 전문성과 역량을 키우면서 춘천YMCA의 사회활동에 대한 꿈과 그림을 그려 나갔다.
춘천YMCA 초석을 다지다.
해방 후 어수선한 시대에 민족이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지역사회발전을 꾀하기 위해 창립된 춘천YMCA는 김홍규 총무가 취임한 1962년까지가 열악한 상황에서 Y운동 뿌리를 내리려는 맹아기였다면 그가 취임한 이후는 YMCA 운동과 목적성을 지역에 싹 키운 발아기였다고 볼 수 있다.
김홍규 총무는 조직가로서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가 총무로 취임하자마자 전개한 활동은 1963년 춘천시로부터 무상으로 장소를 대여 받아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을 위해 ‘직업소년학교’를 개교 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1975년까지 계속 지속되었다. 1964년에는 YMCA 영어·수학 학원을 개관하였다. 또한 ‘춘천시 연합성가단’ 및 ‘어린이합창단’을 조직하였다. 65년도에는 춘천 최초의 국제와이즈멘클럽인 ‘춘천알파클럽’을 촤타시키고, 첫 민간단체 합창단인 ‘은하수합창단’을 창단한다. 1968년도에는 ‘씽어롱 Y’를 창단하고, 1971년도에는 지금의 세종호텔 야외 수영장을 활용하여 ‘어린이 수영학교’ 개설, 중도에서 어린이캠프를 실시한다. 또한 그 해에 어린이Y와 대학Y를 조직하여 창립하고 이사들과 시민의 찬조금을 모아 지역 청년들의 건전한 만남 장소를 제공하기 위하여 커피숍 ‘Y하우스’를 설립한다. 1972년도에는 제1차 재춘 국제청소년 단체(YMCA, 적십자, 보이스카웃, BBS 등) 축구대회를 개최하고, ‘제1회 Y시민 논단’(주제: 세대의 벽은 왜 존재하는가?)을 개최한다. 또한 1973년에는 기독교 관련 기관단체들의 신년교례회를 처음 실시하였고, 춘천Y 최초의 청년클럽 ‘감마’와 중학-Y(다락방)을 창립한다. 그해 ‘늘봄’, ‘아가페’, ‘산악부’ 등의 청년클럽을 조직하여 ‘청년Y 춘천시 연맹’도 만든다. 1974년 제1회 씽어롱-Y 건전노래부르기 발표회와 ‘제1회 십대의 광장’을 개최한다. 그리고 제1회 ‘비서교실’를 비롯하여 ‘제1회 YMCA 관광학교’를 개설하여 지역에서 일자리창출사업을 전개한다. 또한 5월에 ‘YMCA 어린이집’을 개설하여 6월 정식 인가를 받아 운영한다. 1975년 2월 ‘청소년복지회’를 발족하고 ‘대학YMCA논단’을 개최한다. 또한 6월에 ‘제1회 YMCA 회원교육(강사: 김천배, 이남주)’을 실시하고, 제1회 등산학교, 어린이Y응급처치 강습 등을 춘천에서 최초로 시작한다. 1980년 3월 ‘기독교 상조회’를 설립하여 ‘장의차 운송차량 사업’도 전개한다. 그리고 Y체육관 (헬스클럽)을 개관하는 등 김홍규 총무는 지역의 인적자원을 발굴하고 조직하는 탁월한 조직가로서 역할을 다하고 지역과 시대를 고려하여 YMCA운동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늘 연구하고 몸소 추진해 나갔다. 그러다보니 그가 벌였던 사업이나 활동에는 늘 ‘제1회’의 수식어가 붙었다. 이렇듯 그는 지역 곳곳에서 청소년은 물론 지역사회 전반에 걸쳐 새문화 창조와 복지향상을 위한 Y운동을 몸소 활발하게 실천해 나갔다.
춘천YMCA 기둥을 세우고 지역사회와 연결하다.
김홍규 총무는 1980년 8월에 ‘춘천YMCA 신용협동조합’을 창립을 주도하게 되고 첫 번째 조합원으로서 명단을 올리게 된다. 그해 회관건립추진위원회 구성하여 1985년 12월에 ‘춘천YMCA 청소년회관(효자2동 655번지, 지하1층, 지상 5층)을 건립하고 이어 1992년 춘천YMCA 후평동 신관(후평1동 849-6번지 지하 1층, 수영장, 지상4층) 건립하여 시민사회단체중 유일하게 자체 회관을 마련하여 지역 청소년과 주민들을 위한 삶의 질 향상은 물론 배움과 성장의 장을 마련하게 된다.
춘천YMCA가 효자동 회관시대를 열면서 김홍규 총무는 사회적인 활동영역을 더욱 확장해 나갔다. 춘천YMCA가 지역의 크고 작은 기관들의 모체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면서 지역사회의 핵심축이 된다. 이미 70~90년대 춘천지역의 사회활동과 사회기관단체(춘천YWCA, 월드비전, 춘천흥사단, CBS춘천방송국 등) 창단 과정에 김홍규 총무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뿐만아니라 춘천성시화운동, 부활절 연합예배 등 지역 교회와도 연계 협력하여 기독사회활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1985년 지역 시민들과 더불어 ‘양담배 불매 캠페인’을 벌이고, 1987년 춘천YMCA 청소년상담실 및 시민중계실 개소하여 무료 소비자 상담 및 사랑의 합동결혼식 개최를 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 강원도에는 이렇다 할 교사단체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최초의 교사단체라고 할 수 있는 춘천YMCA 교사협의회가 85년 1월 18일 창립하게 된다. 1990년에는 우리농산물먹기운동 전개하고, 국제어린이캠프 개최, 지방자치제 심포지엄 “지방자치제의 올바른 선거를 위한 시민운동” 개최, 환경보존 심포지엄 “플라스틱 제품에 대한 소비자 인식제고”, “어떻게 하면 덜 해로운 물을 먹을 수 있을까?” 등 시민참여활동을 전개하였다.
김홍규 총무는 춘천지역 뿐만아니라 강원도지역에 YMCA확장에도 기여를 하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 강원도내에는 춘천YMCA만 창립되어 있었지만 1967년 10월 원주YMCA를 세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와이즈멘 클럽을 먼저 조직하고 1970년 4월, 원주와이즈멘 클럽을 촤타시킨다. 이어서 1973년 12월 3일 원주YMCA를 출범시킨다. 또한 1967년 강릉 기독교계와 강릉사회와 연계하여 1968년 6월 18일 강릉YMCA를 창립하고, 매년 개최하는 와이즈멘 지구 대회를 속초에서 유치하고 아울러 대회기념사업으로 YMCA설립기금을 기증토록 건의한 것이 동기가 되어 1991년 5월에 속초YMCA가 창립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 외에도 화천, 태백지역 등 YMCA 창립을 시도했으나 지속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강원도내 전역으로 Y활동을 펼친 것은 김홍규 총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탁월한 YMCA 국제 활동가
1970년 10월부터 6개월간 김홍규 총무는 일본YMCA동맹 초청으로 일본에서 연수를 받는다. 언변과 친교성이 뛰어난 김총무였기에 이때 익혔던 일본어 솜씨와 인간관계로 국제 관계에서 일본어 통역을 도맡아 하였으며, 일본 동경YMCA는 물론 히로시마YMCA 등과의 우호 관계를 맺고 회관 건축기금 후원이나 청소년국제캠프 및 사회체육프로그램 교류, 실무자교류 등의 활발한 교류활동을 전개했다. 뿐만아니라 와이즈멘 클럽간의 교류, 동남아시아의 대만(타이난YMCA), 말레이시아(시부YMCA), 싱가포르(싱가폴YMCA) 등 국제교류 및 협력 활동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춘천YMCA ‘영원한 청년’ 으로 남다.
김홍규 총무는 YMCA 정년퇴직 이후에도 지역사회에서 건강하고 활발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특히 YMCA와 더불어 살기좋고 행복한 춘천시민을 위한 ‘스마일 미소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2009년 춘천YMCA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여 출판위원으로 기억과 자료를 모아 ‘춘천YMCA60년사’를 주도적으로 만드셨다. 하긴 춘천Y 60년 역사속에 절반이상을 함께 하셨으니 춘천Y의 살아있는 역사이셨고 김총무님을 빼놓고서는 역사를 다룰 수가 없었다.
늘 김총무님 가정을 방문할 때 마다 춘천YMCA 역사와 관련 자료 그리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적힌 메모지를 건네주셨다. 보관하시던 개인적 Y 관련 기념품이며 자료들을 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두고두고 값지고 의미있는 물건을 조금씩 내놓듯이 말이다. 늘 격려와 응원의 덕담을 주셨고 더욱 발전하는 춘천YMCA 모습을 지켜보시며 함께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셨다.
김총무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찾아뵈었을 때 늘 당부하시던 말씀을 재차 하셨던 것이 마음에 남는다. 바로 ‘미소운동’에 대하여서다. “미소가 사람을 바꾼다. 간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주는 책임과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늘 겸손하고 따뜻한 미소로서 회원들과 시민들을 대해야 한다. 간사의 첫인상이야 말로 YMCA운동의 시작이요 끝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김총무님께서 YMCA 운동가로서 활동가로서 몸소 익히고 실천하셨던 한 말씀 한 말씀, 한 행동 한 행동을 마음에 되새겨본다. 김 총무님은 춘천YMCA의 영원한 청년이요, 나에게는 자상한 멘토로서 영원히 마음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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