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 선생은 YMCA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특히 한국YMCA운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청년성의 상징이기에 그동안 역사적 인물로 그저 대충 그분의 행적을 알았지 구체적으로는 잘 알지도 못했기에 선듯 책을 손에 넣었습니다.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상징은 '영원한 청년'입니다.
조선말 암흑기에 사회운동, 교육운동, 체육, 언론, 독립운동 등 그분의 관심과 열정이 안 미친곳이 없을 정도로 온몸을 헌신하셨던 우리 민족의 거인이십니다.
책에는 월남 선생의 탄생과 어렸을때 부터의 지조있는 성격, 불의를 참지못하는 의지,
독립협회 참여 및 민족 계몽운동과 특히 기독교 개종과 YMCA활동을 통한 민족운동 등의 역사적 세세한 부분까지 잘 그려져 있습니다.
1850년 11월 21일, 충청도 한산군 북부면 종지리에서 고려조의 충절 삼은의 한 사람인 목은 이색의 16대 종손으로 태어났습니다.
1898년에는 서 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민중 계몽에 전력하였고 종교 운동과 청년 운동에 몸을 바치셨습니다.
1904년 55세의 나이로 독립협회로 인한 이완용 등 친러 수구파 탐관오리의 음모로 감옥에 투옥중 기독교로 개종하여 출감후 서울 연동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YMCA에 가입합니다.
1910년 '전국기독교 학생회 하령회'를 개최하였으며, 전국에 걸쳐 100만명 구령운동을 구국운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1911년 일본 조선총독 대라우찌 마사다께 암살 음모가 YMCA 하령회에서 꾸몄다하여 윤치호,이승훈, 김구 등 700명 구속중 최종적으로 남은 피의자가 105인이라한 105인 사건으로 YMCA 초대 총무인 질렛트가 추방되면서
1914년 64세의 나이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YMCA 총무가 되었습니다.
1923년 74세때, 교육을 통한 보다 근본적으로 항일의 간성을 키우려고 민립대학기성회를 만들었습니다.
1924년 조선척후단(보이스카웃) 초대 총재로 그리고 '조선일보' 사장이 되었으며,
1927년에는 78세의 나이에 민족진영좌파와 사회주의 진영이 통합한 반일통일전선으로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허가한 조직'신간회' 의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그 해 3월29일 향년 78세로 영면하셨습니다.
그의 생애는 오로지 일본에 항거하는 꿋꿋한 의지와 애국심으로 일관된 것이었으며, 평생 청년들을 벗삼아 그들을 이끌어주기에 힘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 우리사회의 가장 큰 사회적 문제중의 하나는 청년 실업입니다.
번듯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또한 석,박사 학위를 따고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자리 아니 변변한 일자리 하나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웬만한 청년들은 피해의식과 좌절감, 온갖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낙담의 청년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무한 경쟁과 학벌과 학력, 인맥과 든든한 물적 자산없이는 고개를 바로 세울수 없는 암울한 사회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오늘날 살아계신다면 청년들에 어떠한 말씀을 하실까요?
또한 실의에 빠지 청년들을 위하여 어떠한 활동을 하셨을까요?
월남의 정신은 떳떳하고 당당한 청년상이라고 봅니다.
현재의 문제점을 바로 인식하고 과정을 중시하며 협력하여 최선의 노력과 도전의 모습을 요구하실 것 같습니다.
이 시대에 월남 이상재 선생이 외쳤던 '건강한 청년상'이 필요합니다.
희망과 도전의 '청년자구운동'이야 말로 청년실업을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건실한 세상을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월남 이상재를 다시 마음에 품고 배워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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