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사람책>
이광재 (화가)
- 꿈이음작은도서관- 사람책도서관에서 두번째로 만난 책(사람)은 이광재 화가입니다. 그는 화가이면서 홍천미협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홍천문화재단 이사, 사)꿈홍이음 이사, 현대수족관을 운영하면서 틈틈히 작품에 열정을 쏟기도 합니다.
4.15 홍천군의원 후보로도 출마하셨고요. 특히 지역 청소년과 청년에 관심을 많이 갖고 계시며 홍천 문화발전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화가, 이광재 사람책을 통해 지역에서 예술인으로 꿈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소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람 책으로 초대를 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사람책으로써 내가 살아온 삶과 또한 제가 더 앞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주제로 “홍천에 살아가는 예술가의 삶”이라고 정해 놓았는데 사실 제가 ‘진정한 예술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관련 교육을 받고는 살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한번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홍천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근데 제가 이렇게 남 앞에서 이야기하고 남 앞에서 자신감 있게 얘기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워낙 가난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약주를 좋아하셨어요.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셨고, 주사도 심했기에 어린 청소년 시기에는 굉장히 아버지가 너무너무 싫었어요. 저의 삶 자체도 싫었고, 아버님한테 상처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어린 시절에 자살까지도 생각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삶 자체가 곤욕이구나 하는 걸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깐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아졌고,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어도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에 내 고민을 얘기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혼자 있을 때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그리는 것은 자연스럽게 나만의 상상력을 펼치는 도구였습니다. 혼자 깨작 깨작 화지에다가 그려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였는데 장래희망을 한번 써보라 했는데, 그때 ‘만화가’라는 장래희망을 갖게 된 것 같아요. 그게 막연하게 만화가라고 하는 것이지 그게 뭐 제가 어떻게 어떻게 발판을 마련해 만화가가 되어야지 그런 것은 없었어요.
엄마 아버지한테 미술 학원을 다니고 싶다 이런 말도 쉽게 못 꺼냈지요. 그러다 어떻게 힘들게 해서 고등학교 1학년 말인가 2학년쯤에 교습소라는 것을 처음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가정환경이 어려운데도 미술을 하겠다 그런 열정으로 그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니까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들보다는 책을 많이 봤던 거 같아요. 특히 혼자 있던 시간이 많다 보니 그림에 몰두하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친구보다는 그림이 좋았기 때문에 그림에 대해 계속 연구를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미대에서 가장 힘들다는 장르가 누드입니다. 인체를 그리기가 힘들다 보니 계속 반복하여 그릴 수밖에 없었지요. 10여 년을 계속 누드만 그렸어요.
아버지는 내가 누드를 그리 것에 대해 이해를 못 하셨습니다. 기껏 대학을 보내놨더니 여자 누드만 계속 그리니깐 아버지가 화가 많이 나신 거예요. “너는 그림이 이런 것뿐이냐? 이런 그림은 남사스러워서 남들에게 보여주긴 하겠냐? 이상한 애 아니냐!” 하고는 하셨죠. 사실상 저는 그런 또라이는 아니었고요, 저는 인체를 그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였고, 해부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드 그리는 것을 자꾸 연습하여 새로운 미술의 세계를 탐구해보자 했었던 것이죠. 사실 모델들이나 그런 쪽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많이 친해져서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대수족관 운영
저는 ‘현대 수족관’을 27년째 운영하고 있어요. 미대를 나왔지만 이것으로 도저히 생계를 할 수 있는 것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돈도 안 되는 것들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불만도 쌓였고 도대체 졸업해서 뭐 할 거냐 하시는 데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27년 전에 형님이 하시는 수족관이라는 것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하나의 기쁨을 찾았습니다. 통장의 잔고가 늘어나는 기쁨 또 내가 여태까지 가난하여 친구들도 못 만나고 사실상 물감도 국산 물감 외에는 써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서야 제가 물감을 살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졸업할 때쯤 선배들과 앞으로 어떻게 할 살 것이냐? 이런 내용의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저는 집이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돈부터 벌고 싶다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선배 중에 한 사람은 평생 순수 미술 작업만 할 거야 하며 아직도 그렇게 춘천에서 그림을 그리는 분도 계십니다. 그분은 50대 중반이 넘는 나이지만 다른 직업은 안 갖고 계속 그림만 그리시고 계십니다. 생활면에서 저는 직업을 갖고 27년 동안 경제적인 발판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단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수족관을 하면서 예술가로서 삶보다는 결혼도 하고 아이들을 둘을 낳으면서 아이들을 뒷바라지를 해야 했기에 여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안 됐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변화를 준 것이 미술협회에서의 활동이었습니다.
미협 활동을 하면서 홍천의 어린이날 행사를 17년 정도 참여하면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2회 정도만 빠졌는데 우리 아이들 때문에 안 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 활동이 아마도 예술 활동으로 사회의 첫걸음이지 않나 싶습니다.
홍천미술협회 지부장 역임, 홍천미술관 개관 기여
2010년, 처음으로 홍천 미술협회 지부장을 맡았습니다. 그때 제가 자의적으로 맡은 게 아니라 갑작스럽게 지부장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약간의 공백에서 맡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어떨 결에 맡게 되는 바람에 너무 싫었습니다. 제 개인 시간을 누군가를 위해 일을 하며 많이 뺏길 수도 있다는 생각과 자비로 식사 값이며 출장비 등을 지출한다는 것도 흔쾌히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몇 번이고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하고 그만둘까 생각도 했었지만,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회원들이 많이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군청에도 지속적으로 찾아가야 하고, 공무원 등 관계자들도 만나야 하고, 때때로 강원문화 재단 등 관계 기관에 찾아가서 협의해 나가면서 점차 관계가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 자신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단체를 위한 노력하는 모습에 스스로 보람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최고조의 느낌은 아마도 2014년 홍천 미술관 개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술 문화의 취약지이자 불모지인 홍천에 미술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있을 수 없던 일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미술관 개관까지 많은 분들이 고생을 했습니다.
개관을 하게 되면서 수족관 업에서 미술관 업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의 주업이 수족관 업이 아니라 미술관 업이 돼버린 것이에요. 미술관 운영을 해나가면서 방문하고 찾아오시는 방문객들의 표정을 보면서 뿌듯하고 행복했으며 스스로 큰 변화를 느꼈습니다.
개인전시회
‘이것이 홍천입니다!’라는 주제를 갖고 굉장히 많은 전시회를 했습니다. 가능하면 ‘홍천’이란 테마를 가지고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홍천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아봤어요.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소개를 하였습니다.
미술관에서의 활동을 넓혀 갔습니다. 미술관에 찾아온 아이들이나 청소년들과 함께 놀아주거나 작품을 함께 꾸며보면서 ‘홍천에도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때부터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전엔 내 아이들이 클 때는 바빴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미술관 일을 하면서 그제서야 아이들이 보이게 되더라고요.
내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지? 내가 이곳 홍천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살고 있는데 나중에 죽을 때는 우리 아이들에게 뭔가를 남겨주지 못하면 여기서 사는 의미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을 계속 기획하고 만들고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뭔가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미술 캠프를 진행하면서 문화가 뭔지? 예술이 뭔지? 우리가 접했던 수학, 영어, 과학 등 학문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필요한 인문학이 무엇인지를 찾아주기 위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아이들이 “자라면서 저 사람이랑 같이 미술관도 보고 돌아보기도 하고 재밌는 프로그램을 했었다.”라고 얘기할 거예요.
분명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좋은 엄마, 아빠가 될 거예요. 누구나 좋은 엄마, 아빠가 되는 게 사실은 아닙니다. 행복한 교육을 받고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지 누구나 좋은 엄마, 아빠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술을 통해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같이 얘기를 하길 원했어요. 무조건 미술, 예술은 어렵다가 아니라 같이 참여하고 같이 공감을 해야지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 혼자 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거든요.
아이들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도했던 것이 ‘마을 벽화작업’이었어요. 70~80대 노인분들과 주민분들이랑 같이 뭔가를 해나가면 그 작은 것들을 통하여 마을이 변하지 않을까? 우리의 생각이 변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 보이시는 분이 서면 모곡리에 살고 계시는데 한 번도 붓을 잡아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계속 농사만 지으셨던 분이었어요. 남편이 뭔가를 시켜서 하는 것은 해봤지만 스스로 색칠하고자 붓을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분이신데 벽화작업이 끝난 후 저한테 손을 잡고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내 평생 이런 경험은 없었다고”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죠. “만약 제가 그림을 그렸다면 저 그림보다 더 잘 그렸겠지만 누군가 벽화를 훼손을 해도 아무도 신경을 안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머니가 직접 그리셨기에 명절 때나 어느 날 친척이나 손님들이 왔을 자랑할 수 있고, 훨씬 훼손도 방지하고 더 오래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사진은 아시다시피 ‘홍천 여관 골목’이에요. 다 죽어가는 골목이었고요. 여기에 청소년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하는 그런 골목이었죠. 그 골목 벽을 한 달 정도 넘게 주민들과 함께 벽화를 그렸습니다. 벽화를 그린 이후 ‘여기는 금연 장소입니다.’라는 팻말도 생겼고, 숙박 객뿐만 아니라 벽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아지는 등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 나름 뿌듯하고 기쁨이 넘칩니다.
이 사진은 운동하다가 보셨죠? ‘꽁꽁 축제’를 하면서 어류에 대해서 알아보자 하고 그렸던 것인데 제가 수족관을 해서 그런지 고기를 잘 그립니다. 운동하시는 분들이 지나가다 보면 홍천도 변하는구나 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그렸습니다.
이 사진은 홍천 도서관에 있는 벽화입니다. 파탈 벽화라는 것인데 타일을 깨어서 그린 작품입니다. 아마 강원도에서 가장 큰 벽화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건 약 3개월 정도 걸려서 작업을 한 것인데 워낙에 힘들게 작업을 한 탓에 다시는 이런 작업은 못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지요.
지금까지 몇몇 예술 활동을 통해서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사례들을 얘기했습니다. 내가 수족관을 하면서 쌓이는 금전적인 숫자에 내 배가 부르는 것이 내가 좋았던 시절에서 ‘우리’라고 하는 단어와 ‘함께’라고 하는 단어를 찾기 시작한 것은 사실 얼마 되지는 않았습니다. 40대 중반 정도에서야 내 것이 아니라 우리 것. 나만 행복한 게 아니라 다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조금 늦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만 행복했으면 좋겠고, 우리 가족만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같이 행복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사회를 위하여 작은 역할이라도 기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지금에서라도 알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홍천문화 재단’이 2016년도에 출범하면서 ‘이사’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홍천에는 ‘완장 병’이라는 것이 있는 듯싶습니다. ‘완장 병’은 완장을 찼으면 그에 맞는 책임을 지고 일을 해야 되는데, 완장만 차고 자리만 차지하고 일을 안 하는 병을 완장 병이라고 해요. 그것을 깨기 위해 저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재단의 이사라는 자리면 누구보다 더 많이 뛰고 공부하고 노력해야 이 단체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해서 2년 동안 엄청나게 노력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과 공무원들이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달랐나 봐요. 반대가 좀 많이 늘기는 했었는 데 3년차 이사직을 수행하면서 어쨌든 작은 변화라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화 재단에서 축제를 많이 개최합니다. 축제는 어떻게 보면 홍천을 찾아오는 손님들과 우리 모두가 함께 즐기고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재단 관계자들은 투자 대비 실적, 숫자로만 비교, 평가를 하다 보니 조금 이견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만큼 행복했을까? 얼마만큼 유익했을까? 이렇게 평가를 해야 되는데 그들이 얼마를 썼는지? 등 이런 것들로만 평가를 하다 보니 이견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까도 얘기했듯이 거기 오는 사람들은 다 행복해야 되거든요. 추억을 가져가야 되거든요. 좋은 추억들을 가지고 돌아갔을 때 홍천을 기억하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 ‘나는 옥수수 사갔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죠. 즐거움이 있어야 옥수수도 사는 거죠.
제 생각에는 농산물 축제에서 농산물만을 팔려는 것은 생명력이 짧다고 생각합니다. ‘그 축제에 가서 너무너무 좋고 즐겁고 행복했는데 거기다가 옥수수도 있고, 인삼도 있네!’ 이러면서 사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게 조금 너무 저평가 되는 게 문화 재단에 와서 느낀 안타까움이었어요.
그래서 개선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한테 숙제로 다른 기관장님들도 임기 동안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마음이 급해요.
얼마 전 일본 삿포로, 나고야 등을 다녀왔습니다. 삿포로 눈 축제는 7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세월이 지나고 지자체장이 바뀌어도 계속 계속 유지가 되는 것은 그 마을 주민들이 즐겁고 행복했다는 얘기거든요.
그리고 나고야에는 춤 축제가 있는데 거기에 1등 상금이 얼마나 되냐고 물어보니 1등 상금은 0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연 대회인데도 말입니다. ‘상금이 없는데도 참가하느냐?’ 물었더니 그분들은 ‘돈 때문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위하여 참가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축제도 벌써 20년째 진행되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나고야 축제는 나라와 지자체에서 일체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운영을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참가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반대하지 않느냐?’ 하고 물어보니까 ‘주민들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화장실이나 땅 등을 내놓고 주민들이 직접 참여를 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지 뭔가를 대가를 바라는 게 전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 민족성과 문화와는 별개이겠지만 저는 이번 출장을 통해 일본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행복보다는 우리 모두가 다 함께 행복하자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제 삶의 이렇게 중요한 부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나하나 발전하고 변화하는 것을 보면 저 스스로도 놀랍기도 합니다.
이 장면은 작년에 개최했던 ‘미술 페스티벌’ 모습입니다. 제가 다른 것은 묻지 말고 여기 온 사람들의 행복감과 만족감만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모든 준비와 진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민들이 다 참여를 했고 다 같이 즐겁게 했습니다. 기간은 좀 길긴 했지만 나도 즐기고 아이들도 즐기고 그랬지요.
저는 “작가들에게 제가 맥주를 살 테니 여기서 밤새도록 먹어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공공기관 앞에서 그러면 난리가 나겠지만 그래도 진행을 했습니다.
밤새 즐기는 거리를 만들어 놓으니깐 젊은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젊은 층에서 많이 활성화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젊은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노는 것을 보고 어른들은 여기 뭐 하는 곳이지? 나도 들어가도 되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데 반대로 어른들이 놀고 있으면 젊은 층들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젊은이 문화가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전을 3회를 했습니다. 그림을 하는 화가로서 처음 그림을 배운 후 수족관을 27년을 하고 문화 재단 일을 하다 보니 사실상 제 그림을 많이 못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 공헌 하는 것이 너무 좋고 즐거워서 제 그림보다는 그런 것들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얘기를 했듯이 제 꿈은 만화가이고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마지막 종점을 찍을 수 있는 것이 개인전 3회라고 하는 것이 누구나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제가 4회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여태껏 역량을 발휘해서 한 것은 나도 화가로서의 꿈을 꾸었고 나는 종점으로 3회까지는 하겠다고 해서 3회의 개인전을 한 것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더 못할 수도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홍천이 경제적이다, 어떻게 뻗어 나아갈 것인가? 정치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이런 것을 떠나서 홍천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문화예술이 맨 마지막에 중점 과정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없으면 특별한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보다 잘 사는 데가 많잖아요. 우리보다 농사하는 곳도 더 많다는 말이에요.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만이 갖고 있는 문화예술이 있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문화예술만이 우리를 머물 수 있게 하고 우리 것을 보기 위해 타지에서 온다고 봅니다.
제가 문화 재단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이 우리만이 갖고 있는 이야기가 있어야지만 다른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찾아와 볼 수 있는 것 들을 만드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일입니다.
홍천은 노령화되고 젊은이들이 자꾸 떠나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제가 해온 것은 홍천에 어떤 도움이 되었고, 어떠한 뒷받침이 되었든 간에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든 젊은이들을 품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갖고 있는 매력적인 것이 없으면 저 친구들은 아마 다 떠날 것입니다.
매력적인 것이 있으면 분명히 와서 결혼하겠죠? 아이들이 알 것이고 여기서 또 번창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것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까? 더 재미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52살밖에 안되었는데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더 도움이 될까? 이 지역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하며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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