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사람책>
-그때는 그랬단다.-
/ 석 도 익(소설가)
* 수필가이자 소설가인 석도익은 홍천예총회장, 홍천문인협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홍천문화원 부원장, 향토문화연구소 소장, 한서장학회 상임이사, 사)홍천교육복지네트워크 꿈이음 이사장을 맡고 계신다. 여전히 열정과 지역사회 발전에 큰 공헌을 하고 계신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이신 할아버지 할머니 와 어머니의 아버지 어머니이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 옛날이야기와 사람 사는 얘기를 들으며 자란다.
나 또한 자식과 손자 손녀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는데 기회를 잃었다. TV와 전자게임에 자식들을, 최첨단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손자 손녀마저 빼앗겼다. 애들은 기계하고 놀고 보고 들으니 어른들과는 소통의 부재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사는데 바쁘다고 미루어 두었던 이야기들, 아이들이 어려서 들려주지 못했던 격랑의 세월 이야기, 공부에 방해될까 숨죽여 싸두었던 사람 사는 이야기들, 밥상머리에서 출근하고 학교 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할 수 없어 예절 이야기도 미루어 두고 내려 놓았었다.
왜 일본을 왜놈이라 했는지, 중국 사람을 떼놈이라고 했는지, 동족상쟁의 6.25는 누가 일으킨 전쟁인지, 알려주지 못했다. “보릿고개가 어디에 있는 고개냐?” “배고프면 라면이라도 먹지 왜 굶느냐?” 며 묻는 세대들에게 “그때는 그랬다”라고 제대로 이야기 해주지 못했다. 소통의 부재로 전해지지 않아 단절된 현실은 세대 차이를 더 멀리 떨어져 있다.
영화나 드라마로 간혹 조명되었지만 현세대들은 한낮 영화나 드라마로 재미삼아 보는 작품으로만 생각하니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정치적 논리가 아닌 문화적 평론이 아닌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 삶에 질곡의 발자취를 이야기해 줌으로서 다음 세대들과 세대차이를 줄이는 소통의 문으로 이용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칼럼을 쓰고 학교와 사회단체 등에 강연을 다니고, 글을 써서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때는 그랬단다.
노랑머리 계집아이를 “아이노꼬” 또는 “튀기”라 놀리던 슬픈 시대에는 빨강머리 파란머리는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고 괘종시계 있는 집은 꿈에서 그려보는 부자집이었었다. 배는 고픈데 먹을 것이 없어서 냉수를 한 바가지 퍼먹고, 진달래꽃을 따먹고 칡뿌리를 캐서 씹었다. 그래도 그것이 가난인 줄 모르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물론 라면은 태어나지도 않았었던 때다.
천주교회에서 옥수수죽을 나누어 주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깡통을 들고 줄을 처음 서 봤다. 노란 옥수수죽이 식구 수에 맞추어 그릇에 담아지니 구수한 냄새에 벌써 배가 불러오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우유가루를 배급 주기도 했다. 책은 끈으로 묶고 책보에다 우유를 받는다. 하얀 우유가루 한 주먹, 어머니가 이것을 밥 위에 넣고 쪄주시면 과자같이 맛있는데 아끼려고 물에 풀어서 멀건 국물을 한 사발씩 만들어 주시었다.
아이들은 꽤 커서도 콧물을 질질 흘렸고, 머리에는 기계충이, 몸에는 종기가 얼굴에는 버짐이 번져있어 지저분하고, 비쩍 마르고 배만 볼록해 예쁜 애들은 없고 볼품없이 미운 애들만 골목마다 많았다.
전쟁을 겪으며 자라난 아이들의 놀이는 전쟁놀이밖에는 몰랐던지. 양은냄비 철모에 계급장을 그리고 작대기총 둘러메고 줄을 맞추어 행진하다가 반으로 나뉘어 전쟁놀이를 했다.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 또는 비석치기를 하고 남자애들은 말타기나 나무를 깎아서 자치기를 하다 인원이 많이 모이면 새끼줄을 감아서 만든 공으로 추수 마친 논에서 축구를 한다.
미군이 던져준 껌을 오래두고 씹으려고 밥 먹을 때는 상 밑에 잠 잘 때는 바름벽에 수업 때는 책상 밑판에 붙여놨다가 며칠씩 씹었다.
마을잔치 집에서 돼지를 잡는 날이면 돼지 오줌통에 바람을 넣어 배구라는 것을 처음으로 해본 적도 있다.
학교로 가는 길은 학생들이 일요일 날 모여서 풀을 깎고 길을 고쳤다. 눈이 내리면 집 마당은 물론 이웃집까지 가는 길은 당연히 아이들이 치웠단다.
예쁜 여선생님은 변소도 가지 않을 거라 생각을 했고, 장래희망은 선생님같이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마음먹었다. 어머니는 내가 잘못하면 선생님한데 이른다는 말 때문에 심부름도 잘해야 했다.
설날은 새로 산 하얀 고무신을 신고 마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어른들께 세배를 드린다.
“이 녀석 많이 컸구나. 그래 공부 잘하고 부모님말씀 잘 들어라” 하는 말씀을 많이도 들었다.
보리타작 할 때는 꽤도 덥다. 멀리서 “아이스께끼” 하며 외치는 소리가 너무 잘 들린다. 큰 학생 형들이 메고 다니며 파는 얼음과자 아이스케이크는 빈병하나에 한 개를 바꾸어 주었다. 혓바닥까지 얼어버리는 아이스케이크는 더운 날이면 정말 잊을 수가 없었다.
옛날이야기
언제까지 잊히지 않는 것은 어른들이 밤에 들려주신 옛날이야기다.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아주 옛날”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는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해주시던 옛날이야기는 주로 효자 이야기다. 옛날 옛적에 한 효자가 부모님을 지극정성으로 모셔서 하늘도 감복해 복을 많이 받고 잘살았다는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서바이벌로 진행된다.
할머니 옛날이야기는 주로 도깨비나 귀신 이야기다. 신출귀몰한 도깨비들은 나쁜 사람은 벌을 주고 좋은 사람을 도와주는 의리의 도깨비 귀신이야기는 조금 무섭지만 구미호 같은 귀신이야기는 밤똥을 누러갈 때 혼자는 도저히 못가서 형을 깨워서 밤똥 동무를 해야 했으며 멀리서 부엉이가 우는 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좋은 이웃이 많았다.
집안일을 돕느라 공부는 못했어도 부모님이 제일이었다.
상가집에서 장례를 치르던 상주들이 곡을 하는데, 여자 상주들은 마침내 통곡으로 바뀐다. 옆에 있던 마을 여인들이 함께 울어 초상집은 금세 울음바다가 된다. 그때는 그랬단다.
한국전쟁
나는 6.25전쟁때 4살이었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전쟁의 잔학함을 모른다. 형제가 서로 총을 겨누어야 했고, 화약과 피비린내 진동했던 살육의 현장, 죽어서 부패되어가는 어머니의 젖을 어린아이가 빨고 있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처참함을,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가 되어 다리 밑에서 거지아이로 살아야 했던 비참함을, 포화 속에 헤어진 가족을 잃고 지금도 이산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온 질긴 이별에 아픔을, 폐허가 된 땅에서 가난에 굶주리며 살기 위해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등에 붙은 배를 채우며 살아야 했던 헐벗고 굶주려본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는 전쟁을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네 살 때 일어난 6.25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너무 어린나이에 일들을 기억하느냐며 믿으려 하지 않지만 전쟁이란 상황이 기억 속에 각인시켜진 모양인지 많은 일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해 봄을 지나는 초여름 밤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향기도 아직 거두어가지 않은 가지마다 까칠한 밤송이가 생길 즈음이다.
작은 오두막 부엌에서는 12살인 큰누나와 어머니는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고 툇마루에 걸터앉은 네 살짜리 나와 세 살 위인 둘째 누나 그리고 아홉 살인 형과 전쟁 이야기를 한 것이 나의 첫 번째 기억이다.
당시 김일성은 남침을 준비를 끝내고 사전 탐색 및 정찰을 위하여 수시로 정찰 병력을 내려보내 소규모 도발을 시도하던 때라 마을 청년들로 구성된 청년단에서 밤이면 마을 어귀에서 나무 몽둥이를 무기로 들고 보초를 서야 했는데 어느 날 밤, 한꺼번에 아홉 명의 마을 청년들이 무장공비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아침저녁 기온차가 심한 때라 화롯가에 고사리 손을 쪼이며 형은 전쟁이 나면 냇가에 고기를 많이 잡아가지고 가서 피난 가면서 끓여 먹을 것이라고 했고 작은누나는 냇가에 서있는 밤나무를 잘라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래야 알밤을 피난 가서도 주워 먹을 수 있다고...
그러던 누나는 막상 얼마 가지도 못하고 되돌아온 피난길에서 나를 내려놓고 자기를 업고달라며 울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자 버티고, 아버지는 전쟁이 나자 바로 보국대로 전선에 투입된지라 형은 그래도 맏아들답게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앞장서 잘도 갔다. 나도 가끔은 누나를 업혀 가길 바라고 걷기도 하며 피난민 대열에 끼어서 가던 생각이 난다.
막힌 도로위에 비행기로 퍼붓는 기총 소사 속에 우리 가족은 삼마치 고개를 넘지 못하고 되돌아 집으로 돌아가 전쟁터 안에 있게 되었는데 이때의 중공군과 함께 생활했던 기억들은 아주 생생하다.
갓 서른을 넘긴 어머니 혼자서 올망졸망한 네 명의 애들을 거느리고 전쟁터 외딴 오두막집에서 살기란 죽기를 각오한 것이다.
중공군은 마을에 주둔을 하고 말고개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일먼저 군량미 확보를 위하여 피난 떠난 민가에서 감춘 곡식을 찾아내는데 귀신같았다.
우리 집도 피난 떠날 때 쌀독을 마당 한쪽에 감쪽같이 묻었으나 그들의 탐지에 발견되어 사병들이 곡괭이로 파헤치려 할 때 우리 사남매는 울며불며 곡괭이 자루에 매달려 못하게 하였다. 어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시켜 나도 곡괭이 자루에 매달리며 울었다.
어머니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중공군 장교(군복에 빨간 줄이 있었고 계급장이 요란하게 크고 구두가 긴 부츠같이 멋있어서 장교 같았다.)에게 몸짓 손짓으로 저 아이들과 살아갈 양식이니 살려달라고 울며 애원하니 그 장교도 이 상황을 지켜보더니 어쩌지 못하고 이 집에서 철수 하도록 지시하여 중단했으나 또다시 아찔한 사건이 벌어졌다.
손 태극기를 추녀 끝에 돌돌 말아 꽂아 놓은 것을 그들이 발견한 것이다.
장교는 화를 내며 우리들을 죽일 것 같았는데 이때 마침 통역인 인민군이 와서 어머니는 그에게 그 태극기는 국방군들의 것일 거라 나는 잘 모르며 남편은 의용군에 입대하여 전선에 있고 우리는 남들은 다 간 피난도 가지 않고 남편과 인민군들이 이기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간신히 목숨 부치고 살아가고 있는데 전쟁은 언제 끝나느냐고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애원을 하니 그도 그것을 믿는 모양인지 중공군 장교에게 통역을 해주어 그때부터 그들은 우리들을 각별 보호해 주었다.
낮이면 그들은 전투준비를 하는데 우리 집이 그들의 취사장으로 이용되었다. 우선 식량을 산의 진지로 만들어 올리는데 제일 많이 하는게 김치 주먹밥이다. 쌀과 김치를 넣고 밥을 해서 주먹만하게 뭉쳐서 가마솥을 달군 뒤 거기다 살짝 구워서 자루에 담아가지고 산의 진지로 가지고 간다.
어쩌다 나에게도 한 덩어리 주면 어찌나 맛있던지 자꾸 그들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늙은 장교가 주머니를 비집고 꺼내주던 하얀 알사탕은 정말 별맛으로 기억된다.
낮에 미군 정찰기가 우리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가는 날이면 밤에 어김없이 전투기가 날아와 폭격을 하는데 우리 식구는 저녁이 되면 논두렁에 의지해 만든 움막으로 옮겨 밤을 보냈다.
전투기 소리가 나면 우리는 움막에서 나와 높은 논두렁 밑에 납작 엎드려서 올려다보면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불덩어리는 바로 내 위에 떨어질 것 같아 소스라치면 앞마을 집이 폭격에 맞아 불탔고 중공군들이 어지럽게 뛰어다니는 모습들이 불빛에 보이기도 했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가끔 우리 움막으로 피신해오는 중공군에게 어머니가 나가라고 소리치며 손을 내저으면 그들은 별 반항 없이 다른 곳으로 뛰어갔는데 냇가에 즐비하게 서 있는 커다란 밤나무마다 올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폭탄 터지는 순간의 섬광에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각별하게 보호를 하였다, 전쟁이 있을 것 같은 날이면 우리보고 어서 피하라고 알려 주기도 했으며 그들의 밥하는 것을 도와주려는 어머니를 만류하며 자체적으로 안전하게 보호하였다. 민간인들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군율이 있었던 모택동이 이끄는 군이 전 중국을 승리로 이끌었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비행기 공격으로 어지간히 기선을 제압하고 멀리서 대포 사격으로 진지를 초토화시키고난 뒤 유엔 지상군이 올라와 마을 뒷산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전세에 밀린 중공군은 앞산 말고개를 퇴로 겸 진지로 마지막 백병전이 벌어진 장소가 바로 우리 집이 있는 말고개 밑 원평 들판이었다.
밤새도록 콩 볶듯 하던 총소리가 그친 아침에 움막에서 나와 보면 쌍방의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무서워서 그냥 울어 버렸다.
전쟁이 끝 나갈 무렵 어느 날 저녁 중공군 패병인 장교 한명이 비틀거리며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화약과 사람 썩는 냄새로 진동한 전시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무서운 전염병이 나돌고 있어 아이들만 거느린 어머니는 기겁을 하며 나가라고 소리쳤으나 그는 막무가내로 안방에 들어와 누워버렸다.
우리들은 윗방으로 올라갔고 방문을 통하여 그를 보니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전염병에 걸린 그가 아이들에게 옮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한참을 망설이시더니 이내 그가 깔고 누워있는 왕골자리를 잡아당기며 계속 나가라고 소리치자 그는 간신히 일어나더니 권총을 꺼내 어머니에게 들이댔다.
우리들은 무서워 벌벌 떨며 울기만 했으나 그래도 어머니는 잡아당기던 돗자리에 힘을 놓지 않고 계시자 한참을 쏘아보던 그도 어쩌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방을 나가 뒤뚱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어머니의 목 메인 말씀에 의하면 그는 얼마 못가고 옥수수짚가리 옆에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전쟁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가슴 아픈 사연을 남기고 휴전이 되었지만 그 후에도 그때 매설한 지뢰에 의하며 많은 사람이 죽거나 병신이 되었고 버려진 전시물품은 전쟁을 치룬 아이들의 전쟁놀이에 소품으로 이용되어 어린 생명을 많이도 앗아갔다.
전쟁은 휴전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폐허된 땅에서 가난에 굶주림으로 허덕여야 했다.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를 끓여서 가족의 배를 채우기도 힘든 기아 현장 하루에 한 끼 두 끼로 살아야 했다. 거리에는 거지와 상이군인들이 거리에서 또는 마을 집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 역시 한창 자라 나야할 나이에 제대로 먹지 못해서 머리에는 빌기가 먹어 곳이 흉터가 되고 온몸은 종기가 진물로 마를 날이 없으니 볼품없이 왜소한 체구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다 그랬었다.
전쟁으로 면사무소가 불타버려서 호적을 다시 복구 기록하는 바람에 우리 집은 누님에서부터 당시 막내인 나까지 4남매가 내리 2살씩 줄어서 기록되기도 하였다.
학교생활
국민학교는 당시 시골 공터에 짚을 엮어서 임시로 만든 학교에 입학했다. 집과는 10리가 넘는 거리라서 겨울에는 바지저고리 사이로 들어오는 참 바람에 꽁꽁 얼은 몸으로 울면서 다닌 기억이 있다. 이후로 미군이 면소재지 옆에 판자로 지은 학교로 이사 와서 다니며 통학 길에 미군들이 지나가다 던져준 초콜릿을 얻어먹은 달콤 쌉싸래한 기억이 있다. 점심을 못 먹던 시절 천주교에서 옥수수 죽을 타먹고 무엇보다도 기다려지는 우유배급 날이다. 학교에서 우유주는 날은 보자기를 가져간다. 대략 5홉 정도 주는데 집에 가져가면 이것을 밥 위에 찐다든가 물에 풀어서 먹으면 어쩌다 설사도 하지만 맛도 있고 그것을 먹은 날은 힘이 세지는 것 같았다.
전쟁의 기억이 묻어나는 곳에서 5학년에 이사를 와서 홍천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시골 마을에서 큰 산을 넘어 10리길을 걸어 다녀야하는 산길에는 먹을 것이 더러 있었다. 진달래 잔대 찔레 순 등... 계곡 도랑에는 가재도 있어서 우리는 먹이사냥을 하며 늘 고픈 배를 채웠다. 집에 와서는 사격장에 가서 탄피를 줍고 탄알에 납을 빼내 팔아서 공책 연필도 사고 월사금도 보탰으나, 제때 납부 못해서 오후 수업시간에 집에 가서 돈 가져 오라고 보내주면 집에 가봐야 없어서 못주시는 뻔한 일이라 산에서 먹을 것 찾아 헤매다가 시간이 되면 돌아가서 집에 갔더니 부모님이 일 나가셨는지 아무도 안계시더라고 하며 둘러댔다.
국민학교 6년 다니는 동안 나는 새 교과서를 두 권만 샀다. 5년 먼저 다닌 형의 것을 물려받아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는 전쟁 후였고 해마다 바뀌는 교과서라 형의 것은 당시 것과는 생판 다른 것도 많았지만 책이니까 폼으로만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숙제를 제대로 해 갈수 없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국어시간에 책을 읽으라 하는데 책이 다르다 보니 어쨌든 그것을 보고 읽었는데 갑자기 불이 번쩍 나도록 맞았다. 단임 선생님은 내가 졸다가 엉뚱한 것 읽는다고 화를 내시며 때린 것이다.
이렇게 겨우겨우 졸업을 하고 중학교는 엄두조차 못 내고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돈이 없어 학교를 못갔지만 배우고 싶은 욕망으로 강의록을 보고 배우기로 했다. 그때부터 독학을 하고 시내에 야간으로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을 하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여러 신문을 배달하였다. 낮에는 직장에 사환 일까지 하여 경제적 문제까지 타결하여 명실공히 소년시기 없이 바로 청년으로 사회에 진출했다. 전국에서 최연소로 ‘재건국민운동 종합지도자’가 되어서 홍천군 관내를 순회하며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사회활동
마을금고를 창립하고 새농촌계몽운동 순회강연을 했다. 또한 재건학교를 설립하고, 심지어는 가족계획홍보까지 하였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고 하는 최초의 국민운동이 재건 운동이었다. 이것이 새마을 운동의 효시가 되고 조국 근대화 운동의 시작이었다.
당시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상급학교를 진학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촌은 90% 이상의 청소년들이 배움을 중단하고 삶의 현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형편이어서 나는 ‘야간재건중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북방면 중화계리에 마을 회관을 빌려서 1967년 3월 향토재건중학교를 세웠다. 교실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사과 궤짝을 나란히 엎어놓은 책상을 만들어 놓고, 큰 호야가 씌워진 램프 등잔을 천정에 걸어 불을 밝힌 그야말로 ‘시골야학방’이었지만 각 마을에서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학생중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도 더러 있었다. 60여명이 작은 교실을 가득 메웠으며, 이날 밤부터 영어배우는 소리가 시골마을회관에서 울려 나왔다.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
당시 나의 좌우명이 교훈이 되었다. “된 사람, 든 사람, 난 사람” 이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유전에 의해서 형성된다. 훌륭한 부모가 사랑으로 낳은 아이는 좋은 사람으로 자라난다. 그러나 부적절한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는 선천적으로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이를 채워줄 수 있는 교육으로 바꾸어 주어 인성이 넉넉한 ‘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음은 ‘든 사람’이어야 한다. 머리가 비어있지 않은 가득 들어있는 교육이나 경험 지식이 넉넉하게 들어있는 ‘든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사람이 되어있고 지식이 가득하다고 이를 활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그러니 들어있는 것을 바르게 써야 함으로 앞장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난 사람’이어야 한다. 이러한 좌우명을 교훈 삼아 청소년을 가르쳤다. 수시로 농촌계몽운동을 했으며, 군대 갈 때까지 150여명의 청소년들과 함께하였었다. 그들은 성실하게 일하며 공부하였고, 사회에 나아가 각처에서 많은 일을 하고 참되게 살고있는 것을 보며 가슴 가득히 고마움과 보람을 느낀다.
군에 입대하면서 제대하면 다시 계속해 청소년들을 가르치자 했으나 3년이라는 세월에 빠르게 눈부신 발전을 이룬 우리나라는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사회에 나와서도 학교를 계속하지는 않았으나 청소년들과는 인연을 끝임없이 사회단체를 이끌면서 중고등학교 순회강연과 방과 후 학습 등 꿈 이음을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사회에 옛것과 새것의 조화, 세대와 세대 간에 소통의 부재로 세대차의 불협화음에서 오는 가정과 사회의 불협화음을 최소화 시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현실에 시급한 과제다.
세대 차이는 어른은 스스로 늦게 가려하고, 아이들은 빨리 가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 마음에 거리감이다.
현대 현실에 같이 살면서, 뉴스를 보고 같은 물건을 쓰고 함께 같은 음식을 먹으며 사는데 어찌하여 세대차이가 나겠는가?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세월, 늙으면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도 신체나이는 젊게 하고 있다. 영양과 운동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이 젊음을 많이 유지 시켜주는 것 같다.
우리가 늘 다니는 길도 과거에는 굴곡이 심하고 좁은 길이였으나 이제는 펴고 넓혀서 뻥 뚫린 곧은길을 계속 만들어가고 있다. 꼬불꼬불한 편도 1차선 길에서는 앞에 차가 느리게 간다 해도 추월하기 어렵다. 그러다가 앞이 훤히 보이는 곧은길이 나타나면 앞에 가는 차가 한 두 대라면 기회를 보아 추월해도 될 수 있다 하겠으나, 세대차가 주행하고 있다면, 추월하지 말고 계속 뒤따라 가야한다.
앞에 세대차가 서행으로 간다 해도 추월하지 말고, 차간 거리를 지키며 뒤 따라야 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세대차를 추월해서는 안 된다. 뒤에 따라가는 세대는 앞에 상황을 모르기 때문이며 앞에 가는 세대는 이미 지나온 경험과 앞에 위험을 살피며 가기 때문에 늦게 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세대 차를 추월하면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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