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선생 이야기 <보리울의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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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남궁억 선생 이야기 <보리울의 달>

평화/책

by 함께평화 2014. 3. 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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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꿈꾸며 일제의 탄압과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과 교육운동에 앞장섰던 한서 남궁억 선생의 파란만장한 삶을 소설화 한 '보리울의 달'을 처음 접한 때는 작년 중국 상해 연수를 가기전 6월초반이었다.

 

남궁억 선생은 초창기 한국 YMCA 이사 활동을 하셨고 특히 선생이 낙향하여 무궁화운동을 벌인곳이 바로 춘천YMCA가 3년전부터 위탁운영하고 있는 홍천지역 모곡, 보리울이었기에 책을 보자마자 읽어 내려 갔다.

 

책을 다시 잡은 것은 2014년 올해부터 홍천군청소년수련관에서 일하자마자 지역정체성과 공동체성을 위하여 독서릴레이운동을 전개하면서이다. 독서릴레이 운동의 첫번째 책이 바로 <보리울의 달>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이 책을 세차례나 다시 읽었고, 그리고 남궁억과 관련된 논문과 여러 책을 함께 읽으며 남궁억 선생의 시대정신과 가르침을 되새기게 되었다.

 

남궁억(1863.12.27~1939.4.5)

남궁억은 세계의 새로운 변화 흐름을 읽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학교로서 영어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된 '동문학'에 들어가 공부하였으며, 이후 내부주사로 임관되어 고종의 영어 통역관으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내부 토목국장으로 임명되어 종로와 정동 일대 도로정비와 탑골공원을 창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칠곡부사와 성주목사, 양양군수를 지내는 등 구한말 관료이자, 서구와 일본의 세력에 쓰러져 가던 시대를 살면서 신앙과 교육을 통한 언론, 교육, 신앙을 통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이다.

 

 

조선의 자유민주 정신을 위하여 1896년 서재필과 함게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의 중책을 맡았으며, 이후 만민공동회, 상소운동을 주도했다. 그리고 교육에 관심을 갖고 양양군수로 있던 1906년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월보>와 <가정교육>을 간행하였으며, 배재학당 등에서 가르폈다. 특히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동국역사>>와 전 5권으로 된 <<조선이야기>>를 저술하였다. 

 

또한 남궁억은 국한문 혼용 신문으로 우리나라의 최초의 일간신문인 '황성신문'의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대한협회 창립 및 관동학회 설립 등 애국계몽운동과 민족 운동에 헌신하였다. 황성신문 사장시절 1902년 러시아와 한반도 분할안 토의를 통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갖고 있음을 폭로한 일로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사장직도 사임하게 된다.

 

남궁억 선생은 일본의 탄압과 고문으로 인하여 56세가 되던 1918년 몸을 회복시키고자 선향인 홍천 모곡리로 낙향을 하지만 오히려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무궁화를 심어 농촌을 계몽하고 항일투쟁과 민족운동을 이어간다. 

 

보리울(강원도 홍천군 모곡)은 민족운동과 독립을 위한 숱한 박해와 고난을 당한 이후 남궁억의 가슴속이 꿈을 펼치는 마지막 무대요, 지친 육신과 영혼을 재충전하고 이상향이자 마음의 고향이었던 셈이다.

 

무궁화처럼 우리 민족정신을 의미하고 뜻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는 상징물이 달리 없다고 생각한 한서는 낙향하자마자 보리울에서 무궁화 밭을 일구어 7만이나 되는 많은 무궁화 묘목을 길러서 나누어주고 무궁화 노래를 지어 널리 퍼뜨려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등 민족의 독립과 독립이후를 준비하는 새로운 도전과 희망찬 활동을 왕성하게 전개하였다.

 

한서의 지치지 않는 민족혼과 정신은 1922년 9월 마태복음 9장 35∼38절을 묵상하고 드린 기도문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는 기물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젊어서 가진 애국심을 아무리 혹독한 일제치하 일지라도 변절하지 않고 육으로 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남궁 선생은 1933년 일본이 날조한 소위 '십자가당 사건에 연루되어 71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일경에 체포도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되고 1936년 옥중에서 병들어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병중에서도 한서는 청년들에게 "나는 독립을 위하여 일하다가 가겠지만는 너희는 반드시 독립을 볼 것이니 독립 후의 일을 위하여 준비해야만 한다네. 우리가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설령 오늘 독립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닐세" 하며 간곡히 부탁하였다.

 

남궁 선생은 결국 숙원이던 독립을 보지 못한채 1939년4월 5일 소천하면서도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마고 나무밑에 묻어 거름이나 되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남궁 선생이 소천한지 74년...

남궁 선생은 세계의 변화를 읽으며 특히 일제압제 시대를 살면서 사회운동, 언론운도, 교육운동, 신앙운동으로 민족독립과 독립이후의 시대를 준비하셨다.

독립이후의 민족 분단과 갈등, 경쟁과 자본만능주의, 양극화.. 급속히 변화하는 현 시대..

 

만약 남궁 선생이 살아계시다면 어떠한 활동과 실천을 전개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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