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유서/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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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유서/류시화

평화/시

by 함께평화 2014. 9. 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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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유서

 

 

가을엔 유서를 쓰리라

낙엽되어 버린 내 작은 노트 위에

마지막 눈감은 새의 흰

눈꺼풀 위에

혼이 빠져 나간 곤충의 껍질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차가운 물고기의 내장과

갑자기 쌀쌀해진 애인의 목소리 위에

하룻밤새 하얗게 돌아선 양치식물 위에

나 유서를 쓰리라

      

파종된 채 아직 땅속에 묻혀 있는

몇 개의 둥근 씨앗들과

모래 속으로 가라앉는 바닷게의

고독한 시체 위에

앞일을 걱정하며 한숨짓는 이마 위에

가을엔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장 먼 곳에서

상처처럼 떨어지는 별똥별과

내 허약한 페에 못을 박듯이 내리는 가을비와

가난한 자가 먹다 남긴 빵껍질 위에

지켜지지 못한 채 낯선 정류장에 머물러 있는

살아 있는 자들과의 약속 위에

한 장의 유서를 쓰리라

 

가을이 오면내 애인은

내 시에 등장하는 곤충과 나비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큰곰별자리에 둘러싸여 내 유서를

소리 내어 읽으리라.

 

 / 류 시 화

 

 

* 류시화 시집『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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