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YMCA 창립 경위와 초창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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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YMCA 창립 경위와 초창기 이야기

평화/Y

by 함께평화 2010. 7. 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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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춘천YMCA창립경위와 초창기

1945년의 8.15는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준다. 오랫동안 나라 없이 지낸 설움을 걷어낼 수 있었고 새롭게 민족이 나아갈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꿈은 열정적인 모습으로 표출되면서 좌우익의 이념적 논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단체들의 지나친 움직임 가운데서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며 착실하게 자신들의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단체들도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의 앞에는 YMCA가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YMCA 역시 재건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945년 10월에는 조선 중앙기독교청년회 재건위원회가 소집되어 이사회가 구성하였다. 1947년 8월 13일부터 7일간 우이동 진관사에서는 YMCA, YWCA 연합사령회가 열렸는데, 여기에 전국 12개 도시의 대학과 중고등학교 학생회에서 115명이 참석하였다. 하령회에서 두 가지의 안건이 제시되었는데, 하나는 전략적 도시 4,5개를 선정하여 1차적으로 육성한 뒤, 이를 거점으로 인접지역으로 확대해나가자는 안건이 제시되었고, 다른 안건으로는 전국적 계몽강연을 통해 동시에 많은 지역에 청년회를 조직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한국 YMCA는 동시에 조직하자는 의견을 수렴하여 활동을 벌였는데, 1949년 말 결산보고에 의하면 23개의 지방 YMCA가 창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YMCA의 조직 확대의 노력과 춘천지역 시민들의 요망을 읽어냈던 효신교회 방효정 목사, 강원일보사 사장이었던 김우종 목사, 도립병원원장이었던 김용배 원장, 춘천교도소 교정실장이었던 나사행 목사, 이들 네 사람이 중심되어 YMCA를 창립하기로 합의하고 준비를 하였다. 드디어 1949년 2월 21일 요선동에 소재하고 있는 중앙감리교회에서 50여명의 회원이 모여 역사적인 창립총회를 개최한다. 초대 이사장에 김영배 위원장을 총무에 나사행 목사를 각각 선출하고 회관은 중앙감리교회 내에 두기로 결정을 하였다. 이로써 춘천 YMCA가 탄생하였다.

대한 YMCA연맹에서 중앙로 1가의 대지 20여평 건물 40평 건물(현재 농지 개발 공사)을 본회에 기증하여 프로그램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초기부터 활발하게 움직였던 당시에 프로그램은 주로 신앙 강좌를 비롯하여 교양강좌 각 분야에 걸친 계몽강좌 등이 주를 이루었으며 한편 기독학생운동은 그 나름대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렇게 지내오던 중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 사변을 만나 모든 것을 접어둔 채 피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부산까지 밀렸던 전선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상하기 시작하여 1950년 9월28일 서울을 수복했고, 춘천 10월 2일이 되어서야 국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하지만 그 해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1일 춘천은 공산군의 손에 떨어져 원주와 제천까지 전선이 후퇴하게 되었다. 같은 해 2월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선은 다시 북상하여 춘천은 1951년 4월 4일에 수복된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춘천 북쪽지역의 전투는 계속되었고 밀고 밀리는 싸움으로 춘천의 건물들은 대부분 파괴된다.

강원일보가 임시도청인 원주에서 속간호를 내고 있는 와중에 김우종(당시 강원일보사장) 씨가 제2대 YMCA이사장으로 1951년 2월 1일 취임하게 된다. 춘천YMCA는 전란으로 찢겨진 시민들의 옷소매를 여며주며 구호품을 보급하는 등 봉사활동 전개한다.
한국전쟁은 그동안 애써 이루어놓은 모든 것들을 파괴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후유증은 길었다. 춘천의 대부분의 건물은 파괴되어 모든 기관들은 임시건물을 사용해야 했다. 춘천의 북쪽 지역인 화천, 양구, 인제 지역에서는 전투가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지만 1951년 4월 4일 춘천수복 이후, 사람들의 춘천으로의 복귀가 조금씩 시작되었다.
1952년 4월 1일 박래철 목사(춘천중앙교회)가 2대 총무로 취임하게 되었다. 박래철 목사는 당시 군목이었던 나사행 목사와 더불어 전란으로 파괴된 강원지역의 복구를 위하여 애를 썼다. 미국은 물론 한국군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여 춘천지역을 빠르게 정상화시키는데 기여를 했다.

1953년 4월 10일 제 3대 총무로 김형두 씨가 취임하여 구호활동을 펼친다. 춘천지역은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았다. 회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춘천YMCA이지만 고아원과 병원에서의 봉사활동을 전개했다.
병원으로 사용하다가 폭격으로 1층밖에 남지 않은 건물을 춘천중앙교회가 2층으로 증축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1955년 8월 10일 춘천YMCA는 임시로 회관을 이곳으로 옮겨 청년조직과 활동에 열의를 다하였다. 당시 YMCA가 펼친 주된 사업이 사회사업으로 고아원, 양로원 운영 또는 지원, 우범소년지도, 윤락여성선도와 영수학원 운영 그리고 직업교육으로 이발사와 타자수 양성 등이 있었다. 모든 상황이 열악한 춘천YMCA로서는 직접 운영은 아직 어려운 상태였고 지원사업이나 구호품 보급 또는 YMCA홍보에 역점으로 둘 수밖에 없었다.

1959년 2월 21일 함인섭 박사(춘천농대학장)가 제3대 이사장으로 취임하고, 1960년 3월에 제4대 이사장에 김유찬 목사(동부교회 시무)가 그리고 1961년 4월에 이정엽 목사(춘천중앙교회)가 제5대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변화 속에 제4대 총무인 윤익선 교수(춘천농대)에 이어 1961년 4월에 김형두 총무가 다시 제5대 총무로 취임하게 된다.
임시로 사용해 오던 옥천동 춘천중앙교회에서 나와 그 앞에 사무실을 새로 임대하여 이전한다. 드디어 1961년 4월 3일 YMCA타이프 학원을 설립하여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이발사나 타자수 양성은 타 YMCA의 수익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지만, 지역적인 한계와 운영의 부진으로 결국 자금을 소진하기에 이른다.

1966년 5월부터 1967년 8월까진 춘천시청 뒤뜰에 춘천방송국에서 기증받은 트레일러(14평)속에서 직업학교 운영과 Y사업을 하기도 했다. 한편 교동에 거주하는 외국인 Mr. Seneel이 교동의 대지 423평을 희사하여 힘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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